지난 기획/특집

[대구대교구 100주년 특별기획 - 다시 읽는 드망즈 주교 일기] (49·끝) 연재를 마치며 - 드망즈 주교 일기 속 교회사 장면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11-03-30 수정일 2011-03-30 발행일 2011-04-03 제 2740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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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느님만 믿고 따른 복음화 여정
“주교님이 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1911년 4월 23일)

교구와 함께해온 인생이었다. 한국에 파견된 지 13년 만에 뮈텔 주교(당시 조선교구장)에게 축하인사를 건네받고 시작된 주교 직분. 대구교구의 설정과 동시에 남방교회의 역사를 시작하는 찰나이기도 했다. ‘드망즈 주교 일기’를 끝맺으며, 그의 생각과 말을 통해 보는 교회사 장면들을 담아본다.

1911년 6월 11일 주교 서품식을 마치고 서울 명동대성당을 나서고 있는 드망즈 주교. 이날 첫 교구장을 만나기 위해 대구 지역에서 상경한 신자들로 성당 밖은 인산인해였다고 전해진다.

■ 절실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할머니

“영호공소에서는 성사집전을 했다. 좋은 마을이다. 남편이 순교자였고, 한국에 신부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40년 이상을 살아온 섬 출신의 할머니는 마을에서 몇 년 전 천주교 물건들을 보고 교회로 돌아왔다. 그녀는 다블뤼 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은 이후 처음 성사를 받았다고 한다.”

- 1913년 11월 18일

교구장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사목방문을 다니던 길에는 언제나 감동을 주는 한국인 신자들이 있었다. 드망즈 주교는 인상 깊은 신자들의 모습을 적어놓았는데, 영호공소(현 경남 합천군 삼가면)에서 만난 할머니의 이야기와 사진을 옮겨놓는다. 경상도와 전라도, 길 위에서 만난 양떼들에게는 목자의 위로를 건네고, 성경의 한 장면처럼 모여든 군중 속에서는 연설을 했다. 그 가운데는 외교인과 개신교인들도 섞여 있었다. 주교의 연설은 계속됐고 복음화의 여정은 이어졌다.

영호공소 방문 중 만난 한 할머니. 두 손을 모은 모습에서 절실한 신앙 의지를 엿볼 수 있다.

■ 1차 세계대전으로 선교사 징집

“유럽의 사태가 불길하다. 전쟁(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인가? 소집을 알리는 영사의 편지를 받았다. 나는 즉시 전보를 보내고 선교사들이 해야 할 일을 물었다. 동원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떠나야 한다는 회답을 받고, 제21호 회람을 작성해 발송하고 부주교를 불렀다.”

- 1914년 8월 4일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해외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모두 징집됐고, 그 명단 가운데는 드망즈 주교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프랑스 정부가 제공한 아마존 호를 타고, 배 안에서 미사를 집전한다. 상하이, 홍콩까지 갔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징집유예 통보. 한국으로 돌아오며 그는 “하느님의 뜻대로 이뤄지시기를” 이라고 말한다.

■ 일제강점기 종교계에 대한 압박

“주교 직책을 무시하고 선교사와 총독부 사이에서 일을 처리하려는 ‘포교규칙’ 문제로 서울의 총독, 뮈텔 주교와 서신 교환을 계속하고 있다. 그 적용이 시급해져 즉시 항의해야 한다.”

-1915년 10월 2일

일기에서는 일제강점기 아래 놓인 우리나라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당시 종교계 또한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 중심이 되는 것이 ‘포교규칙’이다. 선교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을 금지해놓은 규칙에는 ‘총독이 주교를 폐위시킬 권한’까지 포함돼 있다.

■ ‘대구교구 첫 사제’ 주재용 신부 서품

“서품식은 노래로, 미사는 독송미사로 거행됐다. 이 새 교구 ‘최초의 사제서품식’에 참석하기 위해 교구 전역에서 모여든 교우들은 대단한 무리를 이뤘다.”

- 1918년 2월 23일

부모님과 함께 사진촬영한 대구교구 첫 사제 주재용 신부.

대구교구의 첫 사제가 탄생했다. 대구의 첫 사제 주재용 신부는 훗날 교구의 4대 교구장이 된다. ‘대단한 무리’라고 묘사될 만큼 교우들은 인산인해를 이뤘고, 교구의 경사에 모두가 기뻐했다.

■ ‘성모신심의 교두보’ 성모당 건축·봉헌

“팡파르 연주와 거대한 군중과 이상적인 날씨 덕분에, 봉헌 동굴의 축복식은 더할 수 없이 성공적이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영광과 감사.”

- 1918년 10월 13일

1918년에는 사제서품식뿐 아니라 루르드의 성모동굴을 본뜬 성모당도 건설한 해였다. 2년 전 소세 신부가 콜레라 증상을 보여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자 드망즈 주교가 ‘소세 신부를 구해 주신다면 성모 동굴을 만들어 드리겠다’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소세 신부는 기도대로 생명을 건졌다.

1918년 10월 13일 축복 당시의 대구 성모당.

■ 조선독립을 향한 신학생들의 열망

“한국 젊은이들이 조선독립을 위한 시위를 했다. 학생들은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고, 아마도 성소를 잃은 학생들도 나올 것이다.”

- 1919년 3월 7일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그 해 대구의 신학교 젊은이들도 거리로 뛰어나갔다. 조선 독립을 위한 거센 시위 속에서 드망즈 주교는 그들의 안위와 신학교의 질서를 걱정한다.

■ 한국교회 79위 순교자 로마서 시복

“성베드로대성당에서 한국 79위 순교자의 시복식이 시작됐다. 교령을 낭독하자 순교자들이 영광 속에 교황좌 위쪽에 그 모습을 나타냈고, 그 감동은 컸다.”

- 1925년 7월 5일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든 한국의 79위 순교자 시복식에 드망즈 주교도 참석했다.

한국의 순교자들이 시복되는 이 영광스러운 순간을 그는 ‘큰 감동’이라고 전한다.

■ 요양 중에도 오직 한국 걱정만…

“이 해의 성과가 많든 적든 간에 그것은 지난 32년간 선교활동과 19년간의 주교직에 추가될 것이다. 나는 이 해들이 내가 갈망해 마지않는 ‘한국인들의 구원’을 위해 바쳐졌기를 바란다.”

- 1930년 12월 31일

병환으로 고국 프랑스로 돌아갔던 드망즈 주교는 병을 치유하고 꿈에 그리던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자신의 임지에서 해를 마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며, 선교활동과 주교직으로 보낸 날들이 한국인의 구원을 위해 바쳐지기를 빈다.

■ 드망즈 주교의 신앙고백

“얼마나 더 계속될 것인가? 상관없다. 하느님이 내게 정하신 그때까지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다.”

- 1936년 12월 31일

한 해를 마감하며 ‘하느님이 내게 정하신 그때까지 나의 길을 갈 것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드망즈 주교.

1936년 6월 11일 대구교구 설정 25주년 및 주교 서품 은경축을 맞아 답사를 전하는 드망즈 주교.

■ 전라도 지역 복음화 새 전기 마련

“교황사절로부터 전주지목구와 광주지목구 설정을 알리는 전보가 왔다. 나는 즉시 그 일을 알리는 회람을 발송했다.”

- 1937년 4월 17일

전주지목구장에 김양홍 신부, 광주지목구장에 맥폴린 신부를 임명한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드망즈 주교는 이 기쁜 소식을 회람을 통해 알린다. 전라도 지역의 교회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이다.

♣바로잡습니다

지난 4월 3일자(제2740호) 10면 ‘대구대교구 100주년 특별기획 - 다시 읽는 드망즈 주교 일기’에서 ‘1911년 6월 26일 드망즈 주교 서품·착좌식’은 ‘1911년 6월 11일 드망즈 주교 서품식’임으로 바로잡습니다.

드망즈 주교는 6월 11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주교로 서품됐으며, 이후 6월 26일 대구로 부임, 다음날 첫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