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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천주실의] (34) 유가(儒家)에 대한 리치의 오해

박종구 신부(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입력일 2011-03-23 수정일 2011-03-23 발행일 2011-03-27 제 2739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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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적 의도(意) 경계하는 유가의 태도 잘못 이해
선악의 근원인 자유의지 무시하는 것으로 여겨
리치에게 불가의 윤회설이 심각한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면, 현실적 인의(仁義)의 실천을 중시하는 유가(儒家)의 인생관은 훌륭한 논의의 주제이다. 유가(儒家)에게 군자의 길은 그리스도인에게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이다. 그 길의 종착점이 그리스도인에게 천국과 지옥이라면 유가에겐 인의(仁義)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로움(利) 때문에, 혹은 해로움(害) 때문에 인의(仁義)를 선택한다면, 혹시 그것은 공리주의적 타산에 의거한 것은 아닌가? 이로움 때문에 인의를 실천하라고 권고하지 않는 유가의 주장에 대해 리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유가적 이상주의(理想主義)의 질문에 천당과 지옥의 상벌론(賞罰論)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인위적 혹은 가식적 의도(意)를 경시하는 유가의 질문이 리치에게는 도덕적 의지 내지는 자유의지의 무시로 잘못 이해된다. 이 점에서 동일한 언어를 다르게 이해하는 의미의 불일치가 나타난다. 이런 불일치를 염두에 두고 리치의 설명을 따라가면, 리치는 <대학(大學)>의 첫머리를 선악의 윤리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대학(大學)은 본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표방함으로써 개인의 수행차원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차원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한다. 그래서 수신(修身)의 내면적 단계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말들이 정심(正心), 성의(誠意), 치지(致知), 격물(格物) 등의 개념어들이다. 선악을 설명하는 리치의 논리는 유가(儒家)의 수신(修身)을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유가의 수신이 정치적 이상인 평천하를 형이상학적 주제와 연결시킨다면, 리치는 윤리적 주제를 종교적 이상으로 승화시키려 한다.

리치가 이렇게 천국과 지옥을 전제하고 윤리적 차원에서 인간의 의지를 설명하려고 한다면, 유가는 인본주의적 태도에서 출발한다. 유가에게 지선(至善)은 인간이 도달해야 할 지고(至高)의 경계이지만, 초월적 가치로 제시된 것은 아니다. 지선의 가치는 대학의 3강령(주자의 이해)-명명덕(明明德), 친민(親民), 지선(至善)-의 하나로 제시되며, 대학(大學)은 이를 인간의 길로써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천국이 그리스도교인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경계라면 종교적 의미에서 그러하다. 여기서 리치에게 필요한 것은 목적지향적인 의지와 의지를 실천하는 덕목, 그리고 그 원천인 하느님의 존재이다.

논어(論語)는 의(意)와 관련하여 공자께서 네 가지 병폐를 끊었다고 하였다. 첫째는 인의적인 의도를 하지 않았다(毋意). 둘째는 꼭 그렇다고 단정하지 않았고(毋必), 셋째는 억지로 고집하지 않았으며(毋固), 넷째는 오직 자기만이 옳다고 하지 않았다(無我).(子罕 9,4). 리치는 이를 유가의 입을 빌려 3가지로 요약하여 무의(毋意), 무선(毋善), 무악(毋惡)이라고 고쳐 말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의미의 오해는 여기서도 계속된다. 리치는 공자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며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없는 것이라면, 궁극적 의미를 실천하도록 요청하는 하느님을 무의미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것을 경계하는 태도와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태도는 얼마나 다른 영역인가?

유가에게는 도리에 순응하는 것이 바로 선이요 덕행이며, 도리를 어기는 것은 악이 되고 못난이가 되는 것이다(夫順理者卽爲善, 而稱之德行 犯理者卽爲惡, 而稱之不才). 그렇다면 인의와 덕의 실천은 그것을 실천하는 인간의 의지와 어떤 관계인가? 이 관계는 리치에게 너무도 분명하다. 의지는 행동에 선행한다는 논리적 선후관계로 설명할 수 있으며, 의지가 선악의 근원이다(意爲善惡之原明著矣)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종구 신부(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