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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100주년 특별기획 - 다시 읽는 드망즈 주교 일기] (47) 1937년 6월 11일~10월 5일

정리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11-03-16 수정일 2011-03-16 발행일 2011-03-20 제 2738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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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끝날까지 하느님사업 멈추지 않는다”
“내 주교성성일 기념일을 매우 간략하게 보냈다. 아침에 피곤하다 핑계대고 학생들의 인사를 면제해 주었다.”

1937년 드망즈 주교의 일기는 간결하다. 업무와 활동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적어놓았을 뿐이다. 갈수록 쇠약해지는 체력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의 주교성성 기념일 또한 피곤하다는 이유를 핑계로 매우 간략하게 보냈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새롭게 설정된 광주지목구와 전주지목구에 관련된 업무를 모두 소화했으며, 주교에게 주어진 책무와 여러 곳을 방문해 성사를 집전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구대교구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생이 마지막을 향해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1937년 6월 11일~8월 1일

내 주교성성 기념일을 매우 간략하게 보냈다. 어제 저녁 수녀들과 신학생들의 축하를 받았다. 아침에 피곤하다 핑계대고 학생들의 인사를 면제해 주었다.

23일, 새 지목구(광주·전주지목구를 뜻함)와 관련된 모든 서류를 가르니에 신부를 통해 포교성성으로부터 직접 받았다. 두 지목을 소집했다.

29일, 2명의 새 지목들이 선서를 하고, 그들을 위해 로마에서 온 서류들을 받았다. 곧 이어 회람 제213호를 보내고, 전라 양도에 대한 나의 재치권이 끝났음을 알렸다.

7월 20일, 나는 9시50분 복사 야고보와 함께 떠나, 3시28분 서울에 도착했다. 라리보 주교를 동반해 튈란느 영사를 방문하고, 서울교구의 병원(1936년 5월 11일 개원한 성모병원을 말한다)을 방문했다.

8월 1일, 오늘 「경향잡지」에 발표되는 한국 일곱 교구장들의 국방에 대한 가톨릭의 협조에 관한 교서(「경향잡지」에 7월 25일자로 실린 ‘비상시에 처한 우리의 의무’란 교서를 말한다)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회람 제123호를 보냈다.

8월 15일~10월 5일

9시 대성당에서 줄리앙 신부가 집전한 국가를 위한 미사에 나는 주교관을 쓰고 목장을 짚고 참석했는데 도지사, 군수, 경찰국장 등이 참석했다. 복음서 낭독 후 나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켰다. 또 회의실에서 당국자들을 만나 간단한 연설을 했으며, 지사가 이에 대답했다. 국가를 위해 대구 신자들이 한 헌금은 ‘832원’이었다.

9월 18일, 8시30분 대성당에서 7명의 차부제 서품식이 있었는데 6명은 대구교구, 1명은 전주지목구 소속이다.

26일, 순교자 첨례. 9시에 대성당에서 강론을 하고 창미사를 집전했다.

28일, 4시 자동차를 타고 하양으로 떠났다.

29일, 하양에서 견진성사를 주고 대구로 돌아왔다.

10월 3일, 왜관에서 330명 이상의 견진자.

4일, 왜관의 학교(1936년 5월 15일 샬트르성바오로수도회 왜관분원에서 설립한 소화여자학원으로 현 순심학교의 전신)와 수녀원의 축복, 오후엔 가실로 떠났다.

5일, 가실에서 견진성사를 주고 저녁때 대구로 돌아왔다.

왜관본당 330여 명의 견진 대상자와 함께 기념촬영. 왜관본당은 현재 1966년 봉헌한 성당을 사용하고 있으며,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위치한 이 성당은 수도원에서 활용하고 있다.
차부제 서품식(1937년 9월 18일). 전주지목구 소속도 포함돼 있다.
왜관 소화여자학원(현 순심중고) 개원 당시 전경. 멀리 왜관성당이 보인다.
26년 동안 드망즈 주교의 복사로 봉사했던 야고보씨의 둘째딸 결혼식. 1937년 당시 가톨릭 결혼예식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정리 오혜민 기자 (oh0311@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