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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천주실의] (33) 불교의 살생금지와 그리스도교의 금육재계

박종구 신부(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입력일 2011-03-16 수정일 2011-03-16 발행일 2011-03-20 제 2738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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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설(輪廻說)에 따른 불교의 육식금지와 달리
하느님의 도리 따르기 위해 소식(素食)과 재(齋) 지켜
한편, 리치가 하느님의 창조신앙을 통해 인간을 포함하여 동식물의 존재론적 차별을 강화한 불편함을 준다면, 윤회설의 생명사상은 그리스도인이 수긍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 생명의 차별상을 지양하려는 불교의 논리는 그리스도교의 창조사상 안으로 개방적으로 통섭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육식(肉食)을 금하는 윤회설의 이유를 모두 살펴볼 수 없지만, 윤회의 고통이라는 관점만 강조한다면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사슬 속에 있는 게 아닌가? 리치는 윤회설의 관점에서 식물도 동물도 먹을 수 없다는 논리를 유도하면서, 오히려 하느님께서 창조한 개별 존재들의 유용성이 윤회의 살생금지를 무효화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주장은 한 시대의 이해와 해석에 제한될 이야기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많은 오해와 오류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살생금지와 관련해서 그리스도교가 허용하는 금육(禁肉)과 재계(齋戒)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불가적(佛家的) 금육과 그리스도교적 금육의 차이를 구별하기 위해 리치는 금육재계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세 가지로 요약한다.(V-11)

첫째, 과거의 잘못, 곧 도리(道理)를 지키지 못했음을 때때로 기억하며 부끄러워하고 후회한다는 의미에서 금욕재계를 행한다. 이 도리(道理)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새겨준 것이요 성현군자가 글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러기에 일반인은 물론이고 성인일지라도 스스로 몸을 낮추고 낮추어 자신의 잘못이 씻어지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은 그를 측은하고 불쌍히 여기시어 죄를 사면할 것이다.

둘째, 인간은 대체로 정의(正義)를 따르지 못하고 인욕(人慾)에 따라 행동한다. 의로움(義)과 달리 사욕(私慾)은 인간의 본래 성품을 해치며 도리(道理)를 망친다. 사욕을 막으려면 인간 자신의 혈기(血氣)를 제어해야 하니, 도(道)를 닦고자 하는 이는 먼저 육체(肉體)를 도적이나 원수처럼 노엽게 보아야 한다(怒視是身若寇讐). 또한 마음과 육체는 주종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으니, 종이 너무 건장하면 주인에게 거슬러 대항할 수 있고, 혈기가 지나치게 강하면 마음의 의지를 위태롭게 한다. 따라서 소식(素食)을 하고 재(齋)를 지키는 까닭은 인간의 오욕(五慾: 귀, 눈, 입, 코, 마음(耳目口鼻心)에서 발생하는 다섯 가지 욕망, 혹은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제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셋째, 이 세상은 하느님의 도리를 추구해야 할 잠깐 머무는 장소이다. 군자는 언제나 자기 마음을 닦고 덕을 행하니, 덕을 실천하는 즐거움은 영혼의 본래 즐거움이요 하늘의 천사들과 같아지는 길이다(德行之樂, 乃靈魂之本樂也. 吾以玆與天神俟矣). 반대로 먹고 마시는 즐거움은 그것이 심하면 심할수록 짐승과 같아지는 것이다. 인의(仁義)는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해 주고, 오미(五味)는 사람의 입맛을 시원하게 한다(仁義令人心明, 五味令人口爽). 그러나 풍성한 음식의 쾌락은 몸과 마음 모두를 크게 상하게 할(豊膳之樂繁而身心俱見深傷矣) 위험이 있다. 세상 사람의 재앙은 바로 마음에 병이 들어 덕행의 아름다운 맛을 모르는 것이니(世人之灾 無他也, 心病而不知德之嘉味耳), 하느님의 도리를 따르기 위해서 소식(素食)과 재(齋)를 준행하지 않을 수 없다.

박종구 신부(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