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올레길 신앙길 (9) 수원교구 은이성지서 미리내성지까지 ‘삼덕’의 길

임양미 기자
입력일 2011-03-09 수정일 2011-03-09 발행일 2011-03-13 제 2737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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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망덕·애덕 고개 넘으며 성 김대건 목숨 건 여정 묵상
박해의 감시망 피하며 사목활동 다니던 길
갖은 고비 넘겼던 성인의 삶 주님 수난 닮아
/ 여정 / 은이성지-신덕고개-와우정사-망덕고개-한덕골-애덕고개-미리내성지(약 4시간 소요)

1846년 포졸들에게 체포돼 모진 고초를 당하고, 반역죄로 사형선고 받아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쓴 성 김대건 신부. 그의 삶은 ‘반역’과 ‘신성모독’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고난의 삶을 그대로 닮아있다.

이번 주에는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지이자, 순교 후 유체 이장 경로 중 일부인 은이성지에서 미리내성지에 이르는 삼덕의 길을 걸어봤다. 2011년 사순의 시작, 신덕(信德), 망덕(望德), 애덕(愛德)의 가파른 세 고개를 넘으며 주님 수난의 길을 따라가 보자.

삼덕의 길

▶ 은이성지에서 신덕고개

은이(隱里). 말 그대로 ‘숨겨진 동네’ 또는 ‘숨어있는 동네’란 뜻이다. 이곳은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첫 사목활동을 펼친 지역. 기록에 의하면 김대건 신부는 밤마다 이 길을 다니며 경기 용인, 이천, 안성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활동을 했다. 포졸들의 눈을 피해 사목활동을 다니던 길이었던 만큼, 은이성지에서 미리내성지까지 이어지는 길은 산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에 위치한 은이성지에서 신덕고개로 올라가는 산길 입구까지는 평탄한 마을길이 이어진다. 산길 입구에 자리한 식당 앞 바위를 끼고 걸어가면 ‘삼덕의 길’ 표지판이 보인다. 파란 바탕에 흰색으로 쓰인 이 글씨가 도보순례 내내 따라가야 할 표지다. 외진 산길엔 인적이 드물다. 낙엽 소시락거리는 소리와 새소리만이 가득한 고요 속에 저절로 묵상에 잠기게 된다.

산길 입구에서 10분 쯤 걸었을까. 눈앞에 가파른 언덕이 나타난다. 신덕고개라 이름 붙여진 은이고개다. 눈 덮인 고개 위로 낙엽이 수북이 쌓인 조그만 길이 나있다. 몇 걸음 채 걷지 않았는데도 숨이 찰 정도로 가파른 언덕을 넘으니 탁 트인 시야와 함께 신덕고개비가 나온다. ‘하느님은 진리의 근원이며, 그르침이 없음’을 굳게 믿는 신덕송이 고어로 새겨져 있는 신덕고개비에서 잠시 고개를 숙인다.

신덕고개비
신덕고개 가는 길

▶ 신덕고개에서 망덕고개

내리막길을 5분쯤 내려오면 다시 마을길이 나온다. 와우정사로 이어지는 이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주목 농장 앞길을 지나게 되는데, 이 농장에는 풀어놓은 개가 많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와우정사를 오른편으로 끼고 길을 끝까지 따라가면 용인-백암간 국도가 나온다. 이 국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1km 정도 걸으면 왼편에 호3통마을 입구가 보인다. 호3통마을 입구에서 망덕고개 입구까지 이르는 길은 생각보다 멀지만 ‘삼덕의 길’ 표지판과 순례자들이 묶어둔 ‘리본’ 표지를 찾아 따라가면 산 입구까지 쉽게 이를 수 있다.

평탄한 등산로를 따라 걷다 보면 망덕고개로 이어지는 긴 나무 계단이 나온다. 이 나무계단 끝은 망덕고개라 이름 붙여진 해실이고개다. 이 고개에는 김대건 신부 유체 이장 당시 기적 같은 일화가 숨어 있다. 김대건 신부의 유체를 이장하던 이민식 빈첸시오가 이 고개에서 호랑이를 만났는데, 그 호랑이조차도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시고 가는 중이니 썩 물러나라!”는 이 빈첸시오의 호령에 길을 비켜줬다는 이야기다. 울창한 숲 속, 김대건 신부의 유체를 지키기 위해 호랑이와 맞섰던 이 빈첸시오가 섰던 바로 그 자리에 서서 망덕고개비에 새겨진 김대건 신부의 음성을 듣는다.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여 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이 시작하려 합니다.”

망덕고개비
망덕고갯길

▶ 망덕고개에서 애덕고개

망덕고개에서 애덕고개까지는 또다시 1시간 30분여의 긴 여정을 가야 한다. 망덕고개비에서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길이 이어지는데, 이곳에서 다시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면 장촌마을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평화로운 쉼터’를 지나 큰 느티나무를 왼편으로 끼고 직진하면 아스팔트 길 위로 다리가 놓여있다. 이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꺾어 도로를 따라 걸으면 전방에 문수산 터널 입구가 보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난 마을길을 따라 500m 정도 걸어들어간 후 소하천을 건너면 다시 등산로 입구다. 애덕고개로 향하는 길이다.

오두재고개라고도 불리는 애덕고개에도 김대건 신부 유체 이장과 관련한 일화가 담겨 있다. 유체를 숨겨둔 콩밭의 주인에 의해 유체가 발각되기 직전, 천둥번개와 함께 비가 내려 콩밭의 주인이 일손을 거두고 집으로 돌아가 유체를 지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새남터에서 미리내까지 갖은 고비를 넘기며 김대건 신부의 유체를 이장했을 옛 신앙 선조들의 목숨 건 여정 또한 주님 수난의 길을 닮아 있었다. 삼덕고개 중 마지막 고개인 애덕고개비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애덕고개비

▶ 애덕고개에서 미리내성지

애덕고개에서 미리내성지까지는 내리막길이다. 느린 걸음으로 약 20분가량 내려가면 길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는 미리내성지 ‘순교자의 모후께 봉헌된 경당’이 나온다. 1928년 건립된 이 작은 경당 앞마당에 김대건 신부가 잠들어 있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참수당한지 약 40여일 후 당신의 첫 사목지였던 미리내로 돌아온 김대건 신부와 목숨 걸고 그의 유체를 이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 등 몇몇 교우들을 기억했다. 두 마을을 지나고 세 고개를 넘어 온 순례 여정을 떠올리며 고개 숙여 묵상했다. 긴 사순시기가 지나고 올 부활을 약속하듯, 고즈넉한 경당 지붕과 김대건 신부 묘지 위로 따뜻한 봄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미리내 가는 길

※은이성지 도보순례 프로그램(매월 셋째주 토요일) 참가문의 031-338-1702 은이성지 사무실. 도보순례 상세코스 은이성지 홈페이지(www.euni.or.kr) 자료실 참조.

임양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