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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천주실의] (32) 세상의 해로운 것들 인간이 자초한 결과

박종구 신부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입력일 2011-03-09 수정일 2011-03-09 발행일 2011-03-13 제 2737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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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짐승 혼 또한 달라
윤회설에 따라 육식 비판
넷째, 사람의 모습이 여타 짐승과 준수하게 다르다면, 혼(魂) 또한 그럴 것이다. 예를 들면, 목수가 목재나 쇠를 가지고 기물을 만들 때, 의자나 탁자를 만들려고 한다면 나무를 사용하겠고, 예리한 기물을 만들려고 하면 쇠를 사용한다. 그러니 사람의 몸이 짐승과 다르면, 사람의 혼이 짐승의 혼과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혼은 자기 몸과 합할 뿐이지 남의 몸과 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섯째, 윤회를 설명하는 인혼변수(人魂變獸: 사람의 혼이 짐승으로 변한다)는 특별한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전생에) 저지른 부정한 행위가 어떤 짐승을 닮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의심일 뿐이다. 사특한 성정은 타고난 인륜도덕을 파괴하며 마음속에 쌓아둔 악행을 멋대로 하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의 얼굴을 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거나, 횡포하고 잔악한 자가 살인에 습관이 들었다면, 그리고 오만불손한 자가 속임수에 익숙하고 겸양을 모르고 남을 해치고 도둑질로 남을 해치면서 생활을 한다면, 오히려 윤회의 결과로 짐승이 되고 악인이 되어 그러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더욱 더 용이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짐승으로 변하는 게 형벌이라면, 이 형벌을 이용하여 악행을 더 크게 저지를 것이다. 이들은 사람으로 살아 있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짐승의 성정으로 멋대로 행동하는 존재들이다. 오직 수치를 아는 이들만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섯째, 불교의 살생금지는 도살당하는 소나 말이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환생이라 여겨서 차마 죽일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나 말을 농사에 사용하는 예를 들어 논밭을 갈게 하거나 수레를 끌게 하는 행위를 어찌 견딜 수 있는가? 부모를 죽인 것과 짐을 지우고 저자 거리에서 채찍으로 욕보이는 것도 동일한 죄가 되지 않는가? 그래서 사람이 짐승으로 변할 수 있다(人變禽獸)는 말은 믿을 수 없다고 리치는 단언한다.(V-4)

만약 윤회한 뒤에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같은 부류(사람)로서 아무 상관없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현세의 인간이 과거에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던 사람인지 모르는데 과연 아무런 거리낌 없이 결혼할 수 있겠는가? 전생에 가족의 일원이, 혹은 종이 후세에 환생하여 자신의 배우자가 되리라고 누가 알겠는가? 성리학에서 말하듯이 인륜을 크게 어지럽히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인간이 두려워하지 않고 결혼을 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불교의 윤회설은 이에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축생의 살생금지 비판은 충분한 설명이 되었는가? 혹시 이는 유학에서 말하는 인(仁)에 가깝고,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자비 실천은 아닌가? 그러나 리치는 윤회설에 따라 불교를 따르는 이들의 육식습관을 비판하면서, 초하루와 보름에만 금육을 지킨다면 이것은 살생을 금지하는 계율의 무용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무튼 하느님은 세상의 만물이 다 쓰일 곳이 있게끔 창조하였다. 세상에 쓰일 곳이 없이 창조된 만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무익하거나 인간을 해치는 독충이나 동물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 지식의 한계를 드러낼 뿐이다. 하느님이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만물을 인간이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제공했고, 이것들은 해로운 것들이 아니었다.(天主初立世界.. 皆以供事我輩, 原不爲害)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거역하면서 사물들 또한 인간을 거역하게 되었을 뿐이다.(自我忤逆上帝, 物始亦忤逆我) 그러므로 이런 해로움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우리 인간이 자초한 결과일 뿐이다.(則此害非天主初旨, 乃我自招之耳) (V-8)

박종구 신부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