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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신앙길 (8) 전주교구 성지와 함께하는 순교자의 길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1-03-02 수정일 2011-03-02 발행일 2011-03-06 제 2736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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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자연풍광에 숨겨진 처절했던 박해·순교 현장
/ 여정 / 전주고속버스터미널-숲정이성지-서천교-초록바위-치명자산성지-전동성당(약 9km, 치명자산 산상기념성당 도보 포함 평균 3시간)

‘바쁘다 바쁘다’를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마음 한편은 늘 홀연히 떠나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다. 일상을 훌훌 털고 하루쯤은 내가 먼저 하느님께 말을 걸어보자. 한 발만 내디디면 된다. 한낮, 기도하는 이 몇몇만 앉아있는 성당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내어줄 뿐이다. 특히 순교자들의 발자취는 바쁜 삶을 변명 삼아 닫아 둔 신앙의 빗장을 더욱 쉽게 열어준다.

한국교회 대표적인 순교성지들이 자리 잡고 있는 전주. 전국 어디에서든 하루 일정으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기차, 고속버스, 자가용, 어떤 교통수단으로도 접근성이 편리한 도시이기도 하다. 게다가 성지와 성지를 잇는 길은 빼어난 자연풍광과 전통문화 체험의 기회까지 내어준다. 일부 순례길은 신자들뿐 아니라 일반 관광객들에게 먼저 입소문이 난 길이기도 하다.

▶ 숲정이성지

전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부터 운동화 끈을 동여맨다. 첫 순례지는 전주 숲정이성지. 터미널 네거리에서 전주천 동로로 들어서, 진북초등학교 쪽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계속 직진을 한다. 거리는 1.6km 정도다.

숲정이성지는 지방문화재 제71호다. 군사훈련장이기도 했던 이곳은 신유박해 때부터 신자들의 피로 적셔졌다.

호남의 첫 사도인 유항검의 가족을 비롯해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스러졌다. 이곳은 순교성인의 후손이 순교 터를 보존하고자 땅을 사들이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됐다.

그러나 함께 자리했던 해성학원을 이전하면서 성지 터가 많이 줄어들고 주변에 아파트촌도 자리 잡았지만 도심 안에서 고요를 맛보는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기도서를 지니지 않아도 십자가의 길 기도를 봉헌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각 처마다 기도문을 담은 안내석을 세워뒀기 때문이다. 특히 관리인이 상주해 기도하길 원하는 이들에겐 24시간 성지를 개방한다.

숲정이성지.

▶ 서천교와 초록바위

숲정이성지에서 나와 곧바로 우회전 한다. 본격적으로 전주천을 따라 걷는 여정이다. 평소 전주 시민들에게는 산책길로도 애용되는 곳이다. 성지에서 초록바위까지는 2km 남짓한 거리다. 초록바위에 앞서 300m 전방에 서천교가 있다.

서천교 밑을 지나갈 때는 마음이 더욱 숙연해진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조윤호는 이곳에서 매질을 당하고, 걸인들에 의해 밧줄을 목에 걸고 질질 끌려 다닌 후 순교했다. 그와 함께 붙잡힌 아버지 조화서는 바로 이전에 들렀던 숲정이에서 처형됐다. 아버지와 자식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다는 당시 법에 따라 그의 처형은 뒤로 미뤄져 서천교에서 행해졌다.

“이 세상은 잠깐 동안이요, 죽은 뒤의 세상은 영원한데, 잠깐 세상을 탐하여 배교하기보다 죽기를 바랄 뿐이다.”

잠시 멈춰서 조윤호가 마지막 남긴 말을 떠올려본다. 순교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 초록바위는 남종삼 성인과 순교자 홍봉주의 아들을 각각 물에 밀어 넣어 순교하게 한 자리다.

▶ 치명자산성지

초록바위에서 치명자산까지는 1km 정도 거리로 더욱 가볍게 걸을 수 있다. 초록바위를 지난 첫 네거리에서 우회전을 해 직진으로 길이 나있다. 치명자산성지 입구에는 높다랗게 세워진 예수성심상이 두 팔을 펼쳐 반겨준다.

치명자산에 들어서기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동정부부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순이·유중철 부부는 순교하기까지 동정 서약을 지키며 그리스도를 따랐다. 독신은 결코 허용되지 않았던 조선시대 상황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 성소로 볼 수 있다.

전주 시내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치명자산에는 이순이와 유중철을 비롯해 호남의 첫 사도인 유항검 등 그의 가족 7명이 하나의 유택에 모셔져 있다.

해발 300m 높이에 자리한 이 묘까지 올라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로 조성됐다. 성인 발걸음으로 평균 30분이면 오를 수 있는 여정이지만, 평소 운동과 친하지 않은 도시인이라면 쉬엄쉬엄 기도하며 걷기를 권한다. 치명자산을 오르기 위해 운동화 등 편한 신발을 갖추면 좋다.

지방기념물 28호로 지정된 묘 뒤에는 일명 ‘예수 마리아 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다. 앞에서 보면 하늘을 우러른 예수상 같기도 하고, 뒤에서 보면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상 같기도 한 희귀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 가톨릭사진가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찍고 싶어 하는 바위다.

산상기념성당은 묘 바로 밑에 자리잡았다. 오직 사람의 발로만 올라갈 수 있는 바위 벼랑을 깎아 지은 성당은 화강암과 모자이크 벽화로 꾸며졌다. 이곳 성당에서는 평일 오전 11시(토요일 오후 4시) 미사가 봉헌된다.

또 성지 초입 옹기가마경당에서는 해마다 사순절 기간 동안 매일 오전 5시30분에 미사가 봉헌된다.

치명자산 성지의 묘와 ‘예수 마리아 바위’. 이 바위는 앞에서 보면 예수상, 뒤에서 보면 기도하는 성모상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치명자산 옹기가마경당

▶ 전동성당

마지막 순례길은 전동성당까지 이어진다. 치명자산에서는 2.2km 거리. 성지를 나서 전주천 옆 가리내길을 따라 팔달로로 들어서면 전동성당과 마주할 수 있다. 전동성당은 영화와 드라마 등의 배경으로 입소문이 났을 뿐 아니라 경기전 바로 맞은편에 자리 잡아 전주를 찾는 이들이라면 꼭 한 번쯤 머물다 가는 명소다.

전동성당, ‘끝’이 바로 ‘시작’이 되는 곳이다.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를 기억하며 조성된, 호남 지역 선교의 모태가 된 성당이다. 성당 바로 옆 풍남문에서는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유항검을 비롯해 초대 전주 지역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처형됐다.

역사적, 교회사적 가치뿐 아니라 외형적 아름다움에서도 늘 손꼽히는 로마네스크식 건축물이 바로 전동성당이기도 하다. 특히 12개 창이 있는 종탑부와 팔각형 창을 낸 좌우 계단의 돔 등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선보인다.

전동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의미 있는 여정이 될 듯하다. 성당을 나서면 곧바로 한옥마을과 전주의 유명한 맛집 등과 마주할 수 있어 전라도의 맛과 정을 느껴볼 수 있다.

길 위에 서서 제 갈 길만 가기 바쁜 삶. 그 작은 한 토막을 나눠 역사와 순교의 길 위에서 보낸 시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준다.

호남 지역 선교의 모태 전동성당.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