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013년 수원교구 설정 50주년 특집] 초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에게 듣는다 (13) 교구의 기초 다지다 (하)

정리 이우현 기자
입력일 2011-03-01 수정일 2011-03-01 발행일 2011-03-06 제 2736호 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주교가 해야할 큰 일은 “외국 원조 받기”
첫 교구청을 지었던 일은 정말 잊지 못할 거예요. 처음 화서동 땅을 샀을 때는 아무것도 없고 허허벌판이었어요. 그때 건물을 짓기로 한 건설회사 사장이 교우였는데, 나보고 터를 잡으라고 하더군요.

나침반을 놓고 측량을 했는데, 정남향으로 하기보다 동쪽으로 약간 트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동쪽으로 더 향하면 아침에 햇볕도 많이 들어서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지금도 팔달산에 올라가면 화서동 일대가 다 내려다보이는데, 후일 화서동에 들어선 집들은 모두 정남향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교구청만 약간 뒤틀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아무것도 없던 땅에 교구청을 지었지요. 사실 예전에는 길도 형편없어서 비만 오면 장화를 신고 거의 물속 같은 진흙땅을 걸어 주교관으로 들어가고는 했어요.

교구청은 1966년 공사를 시작해 1967년에야 완공됐지요. 건축에 쓰인 돈은 지난번에 언급했던 교황청 특별보조금(건축보조금)과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의 지원금 등으로 충당했어요.

그때는 한국 주교들이 외국에서 원조를 받아오는 것이 주교가 해야 할 큰일 중 하나였지요. 나 역시 교구장이 되자마자 재정적으로 준비된 바가 없으니 독일에 찾아가 모금을 하기도 했어요.

로마에서 공부할 때, 여름방학 시기마다 독일 쾰른교구 신학생 부제반과 함께 여행그룹을 만들어 독일에 산업시찰을 다녔어요. 전교지방에서 온 학생신부(공부하러 온 신부) 15명 정도를 모집해 여러 곳에 구경을 다녔지요. 당시 신학생들과 함께하면서 친교를 많이 쌓았어요.

그들과는 내가 교구장이 된 이후에도 연락이 닿았어요. 그때 그들은 독일 각 본당의 보좌신부가 돼 있었지요. 이들에게 수원교구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어요. 주일미사때 강론을 하고, 모금활동을 했지요. 그렇게 독일에서 꽤 많은 원조를 받았던것 같아요.

바티칸공의회 회의가 있을 때마다 찾아다니며 모금활동을 벌였어요. 독일어를 조금 할 줄 알았기에 강론 원고를 도움을 받아 써가지고 다녔지요. 미국에서도 모금활동을 5~6년 간 계속했어요. 그때는 모금을 해야만 한국에서 성당도 짓고, 교구 운영을 할 수 있던 시절이었어요.

1967년 완공된 화서동 주교관 초기사진.

▶다음호에 계속

정리 이우현 기자 (helen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