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안영의 초록빛 축복] 선행은 빼앗고, 감동은 남기고

입력일 2011-02-16 수정일 2011-02-16 발행일 2011-02-20 제 2734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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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까?
저에겐 영세한 뒤부터 생긴 습관이 있습니다. 어디서나 수녀님들을 만나면 일부러 눈을 맞추고 “저도 교우예요” 하고 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평생을 주님께 바친 분들이니 그렇게라도 존경과 감사를 드리고 싶어서이지요.

우리 동네에는 바오로딸 서원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수녀님들은 저희 집 가까이에서 살고 계십니다. 저는 가끔 서원에 들르기도 하고, 본당도 같아서 새벽미사 때면 자주 뵙게 되니까 그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지내지요.

지난 세밑에 여기저기 인사할 곳을 챙기다가 그곳 수녀님들 생각이 났습니다. 선물만 내미는 것보다는 식사 대접을 한 번 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주일 아침 미사에 갔다가 그곳 수녀님들과 가까운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좋은 기회다 싶어 얼른 종이와 펜을 내밀며 전화번호를 적어 주시라고 부탁했지요. 미사 후 집에 돌아와 바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식사 대접하고 싶으니 다음 주 좋은 날 시간 좀 주시라고. 전화를 받은 수녀님께서 원장님과 상의해서 알려주마고 하시더니, 오후에 전화가 왔습니다. 평일엔 근무 때문에 곤란하니 오늘 저녁이 어떻겠느냐고. 그렇게 해서 하고 싶은 일이 바로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귤 한 상자를 차에 싣고 수녀님들 숙소로 갔습니다. 원장 수녀님께서 반가이 맞아 주시며 잠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전에도 몇 번 갔었으나 집 안으로 들어서긴 처음이라 기뻤습니다. 정갈한 실내, 멀리까지 툭 트인 전망, 아름답게 꾸며진 경당 등을 구경하며 거룩한 분위기에 젖으니 제가 먼저 대접을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수녀님들을 모시고 새마을 연수원 골목의 ‘마실’이라는 음식점으로 갔습니다. 이름이 정다워서 손님이나 친구들을 대접할 때 잘 이용하는 집입니다. 우리는 눈 쌓인 나뭇가지가 훤히 보이는 방에서 유난히 추운 날씨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살짝 열려 있는 우리 방 문 틈으로 어떤 신사 한 분이 자꾸만 기웃거리는 것이 보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인가? 수녀님들이 좀 특별하게 느껴져서인가? 하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이 마침내 쓰윽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수녀님, 수녀님들을 뵈니까 너무나 반가워 들어왔습니다. 사실은 제 고모님도 수녀님이셨거든요. 저를 무척 사랑해 주셨는데,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수녀님들 뵈니까 고모님 본 듯 반가워서 이렇게 불쑥 들어왔습니다. 요즈음 바쁘다는 핑계로 성당에도 잘 안 나가고 있는데 어찌나 반갑고 죄송한지요. 오늘 이 식사대는 제가 치르고 싶습니다.”

순간 저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제가 모시고 왔어요.”

하지만 그분은 제 옆에 놓인 계산서를 집어 들고 허락해 달라고 사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수녀님들도 그렇게 해 드리는 게 좋겠다고 합니다. 저는 도저히 그냥 말 수가 없어서 성함과 연락처를 적어 달라고 수첩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아니라고 합니다. 저도 고집이 있어 조릅니다. 그러자 자기는 공직에 있는데, 함부로 주소나 연락처를 주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제야 저는 “고모님 세례명, 형제님 세례명이라도 알려 주세요. 기도해 드릴게요.” 라고 했지요. 다행히 두 이름은 알려 주었습니다.

그분이 떠난 뒤 머쓱해진 제가 “좋은 일 하러 왔다가 엉뚱한 형제님에게 빼앗겼네요.”하고 말하자, 원장 수녀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닙니다. 우리도 즐겁게 식사했고, 그분에게도 아주 좋은 일 하신 겁니다. 그분으로서는 아주 큰 위로가 되었을 거예요.” 다른 수녀님들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십니다. 이 일도 주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것일까요? 선행은 빼앗겼지만 감동을 남겨 주신 사도요한 형제와 벨라뎃다 수녀님을 위해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