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대구대교구 100주년 특별기획 - 다시 읽는 드망즈 주교 일기] (43) 1935년 10월 14일~12월 31일

정리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11-01-19 수정일 2011-01-19 발행일 2011-01-23 제 2731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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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발전사 기록하며 복음화사업 기반 일궈
“매우 아름다운 첨례였다. 새로운 영성체 제도를 도입했는데 처음 시작 때 내가 영성체를 시키고, 다음 신부들이 영성체를 시키는데 그간 나는 미사를 계속한다. 의식이 한 시간 단축됐다.”

1935년 10월, 드망즈 주교는 새 성당 축복식과 사목방문을 위해 경상도 지역을 순방한다. 그는 어느 성당을 축복했고, 그 성당의 주보성인은 누구인지까지 꼼꼼히 일기에 기록해놓았다. 특히 옥포본당의 경우 성당 건물을 짓는데 2900원, 사제관과 부속 건물까지 4600원이 들었다는 기록은 당시 물가를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일제의 종교 탄압 속에서도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속속 도착했다. 선교사들은 정부에서 요구하는 서류에 서명을 하고 목포로 떠난다.

1935년 10월 14일~11월 21일

교황사절의 주교미사. 새 회의실에서 교우들의 모임. 일본인 본당 방문. 저녁에는 8시42분 기차를 타는 교황사절을 역까지 동반했다.(중략)

11월 6일, 황리성당(주보성인은 성모성탄)의 축복식. 오후에 두 신부와 함께 통영으로 출발. 이 야고보 신부는 우리를 황리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던 자동차로 도착했다.

7일, 통영성당(성모의 무염시태)의 축복식. 1시30분부터 3시30분까지 신부들과 같이 하청항까지 항해했다.

8일, 아름다운 옥포성당의 축복식(매괴의 성모). 성당은 짓는데 2900원이 들었고, 신부댁과 부속 건물까지 합치면 4600원이 들었다(드망즈 주교는 진영, 문산, 황리, 통영, 옥포, 진해, 마산 등 경상도 지역을 거쳐 성당 축복식을 열고 다시 대구로 돌아온다).

19일, 열강이 합방을 인정해주는 대신 일본 정부가 한 약속을 일방적으로 위반함으로써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내년 4월부터 소유권을 금하는 입법 계획에 대한 항의문’을 대사에게 전달하도록 그것을 영사에게 보냈다.

21일, 새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도착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패트릭 델빈 신부, 미국을 거쳐 온 프랜시스 우즈 신부, 미국을 거쳐 온 토마스 쿠삭 신부, 영국인 오스틴 스위니 신부 등이다.

23일, 아일랜드 신부들은 어제 선서를 한 후에 권한을 받고, 정부에서 요구하는 서류에 서명을 하고, 오늘 아침 목포로 떠났다.

12월 21~31일

6시30분 7명의 신학과 학생들에 대한 1·2품의 서품식이 있었다. 금년 정초에 그들의 수가 10명이었는데 한 명은 지도신부의 의견에 따라 떠났고, 두 명은 그들의 지도신부들이 서품 청원을 시키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청원을 받고 나서 10월 28일 그들에게 정확하고도 엄격한 훈시를 보냈다. 그것은 이 서품식의 서류에 보관돼 있고, 또 이에 관해 그들의 교장 신부가 15일간 영적독서 시간에 해설을 했다. 교장 신부의 증언을 받고 나서 나는 그들의 청원을 수락하고 오늘 서품식을 거행하게 됐다.

25일, 매우 아름다운 첨례였다. 새로운 영성체 제도를 도입했는데 처음 시작 때 내가 영성체를 시키고, 다음 신부들이 영성체를 시키는데 그간 나는 미사를 계속한다. 영성체는 내가 세 번째 미사를 끝낼 때 끝났으므로 의식이 한 시간 단축됐다.(중략)

31일, 금년 한 해에 대해 천주께 감사!

1935년 10월 14일 교황사절 마렐라 주교 방문 당시의 대구성당(현 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과 인근 모습.
1935년 10월 14일 대구성당(현 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에서 교황사절 마렐라 주교 주례로 봉헌된 미사 장면.
1935년 11월 9일 당시 진해성당 봉헌식 기념촬영.
1935년 12월 25일 당시 부산성당에서 봉헌된 미사 장면.

정리 오혜민 기자 (oh0311@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