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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천주실의] (28) 피조물은 하느님의 흔적

박종구 신부(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입력일 2011-01-19 수정일 2011-01-19 발행일 2011-01-23 제 2731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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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본성상 천주와 달라 하느님의 ‘흔적’일 뿐
하느님과 나의 일치 관계 존재론 차원서 다루는 한계
리치가 자주 언급하는 그리스도교의 창조사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무엇보다도 하느님(天主)의 만물 창조는 없는 것에서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若夫天主造物, 則以無而爲有). 달리 말하면, 창조의 첫 번째 의미는 무(無)에서 만물을 창조하는 것(creatio ex nihilo, 창세 1장)을 가리킨다.

창조는 하느님의 무한한 능력을 가리키며, 하느님이 인간과 어떻게 다른지 알려주는 표현이다. 사람과 만물의 이치는 모두 하느님의 흔적(人物之理, 皆天主蹟也)일 뿐이다. 슬기로운 이의 마음은 천지를 포함하고 만물의 이치를 갖추고 있지만, 진짜 천지만물의 몸체는 아닌 것이다(智者之心, 含天地具萬物, 非眞天地萬物之體也). 인간은 그저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살펴서 형체를 비추어보고 그 관념을 파악하고 근본을 추구하며 그 쓰임을 이룰 수 있을 뿐이다(惟仰觀俯察, 鑑其形而達其里, 求其本而遂其用耳).

그러나 인식론의 범주에서 존재론의 차원을 논증하려는 리치의 논증 방식은 재논의가 필요하다.

리치의 표현 중에서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고요한 물과 밝은 거울 같은 것이 만물을 비춘다고 하여 곧 바로 밝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이 모두 그 안에 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요 그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한다면 옳겠는가?”(若止水, 若明鏡, 影諸萬物, 乃謂: 明鏡止水, 均有天地, 卽能造作之, 豈可乎?) 그러나 참 나를 일컫는 ‘천주’와 인간의 ‘나’가 일치된다는 표현은 사실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수행론의 입장에서 참구해야 할 말이다. 하늘의 주인과 지상의 인간 ‘나(我)’가 일치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다루려 한다면, 리치의 논의방식은 여전히 동양적 사유방식을 따라감에 한계를 드러낼 뿐이다. 리치의 주장은 아주 과감하다. 우리와 하느님이 하나가 아닌 것을 어찌 증명하지 못할 것인가? (則吾於天主 非共爲一體, 豈不驗乎?)(IV-9)

이 증명을 위해 리치는 세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정리해 나간다.

첫째로, 하느님의 존재를 개개의 사물이라고 주장한다면, 하느님과 사물의 본성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물들에도 각각의 본성이 있는데 천주와 피조물 사이엔 분명히 본성의 구별이 있지 않은가? 더구나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의 몸이라고 주장한다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 자신을 섬기는 꼴이 된다. 둘째로, 하느님을 사물의 내면적 성격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리치는 이 주장이 하느님의 존재를 사물보다 못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무릇 전체는 부분보다 크고, 밖은 안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하느님이 사물 속에 내재하며 사물의 본연적 성분이라면, 사물은 하느님보다 더 큰 존재가 된다. 셋째로, 하느님과 만물의 몸체는 동일한가? 만약 하느님이 만물을 사용하는 주체라고 말한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만물과 동일체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비유를 들면 석공은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고, 어부는 어부가 사용하는 그물이나 배가 아니다. 오히려 농부는 쟁기를 사용하여 밭을 갈고, 나무꾼은 도끼를 이용하여 나무를 벤다. 도구인 쟁기나 도끼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이용하는 인간이 일하는 것이다. 또한 사물은 소멸하여 그것과 연관된 부류로 돌아갈 뿐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만약 사물이 소멸하여 천주께 돌아간다면,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태고 사람을 온전하게 해 줄 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악을 행하면 벌을 받고, 선을 행하면 상을 받아 하느님께 돌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창조물을 하느님과 동일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흔적’(天主之迹)이라고 말해야 한다.

박종구 신부(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