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대구대교구 100주년 특별기획 - 다시 읽는 드망즈 주교 일기] (42) 1935년 2월 25일~10월 7일

정리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11-01-12 수정일 2011-01-12 발행일 2011-01-16 제 2730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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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잊은 활발한 활동
한국인 사제 점차 늘어
“12명의 사제 서품식. 일찍이 한국에서 없었던 가장 아름다운 서품식이었다.”

1935년 드망즈 주교는 환갑을 맞은 나이에도 불구, 활발한 활동을 지속한다. 그러나 대구와 서울, 일본, 평양 등을 방문하며 부지런한 생활을 하던 그에게 다시 ‘심장 발작’이라는 건강이상의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한편 6월, 12명의 새 사제가 태어났다. 드망즈 주교는 이를 가리켜 ‘일찍이 한국에서 없었던 가장 아름다운 서품식’이라고 전했다. 한국인 사제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1935년 2월 25일~6월 7일

프랑스 영사 드페르씨가 토요일 저녁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프랑스로 떠나기 전 휴가를 지내러 왔다가 오늘 떠났다. 최근 그는 성청(聖廳)의 프랑스 대사관의 한 직원이 참석한 로마의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우어 주교(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를 말함)가 한 진술의 진실성’에 대해 외무부로부터 조회를 받았다. 원산의 대목(代牧)은 한국 북쪽에서 생겨난 복음 전파의 신속한 발전이 ‘그의 선교사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대량으로 개종시키고, 그 결과 그들을 이교(異敎)와 공산주의로부터 떼어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4월 22일, 나는 치아 2개의 종기와 다시 일어난 심장 발작으로 활동을 중지했다.

25일, 대구시와 교회의 모든 성직자들이 나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소위원회에 모였다. 우리는 거기에서 어디서 구한 것인지 모르지만 진짜 샴페인 한 병을 마셨다.

5월 26일, 한국인 사제들의 피정 강론을 했다. 참사회에서 새로 신부가 될 사람들의 임지를 결정하고, 서울의 서병익 바오로 신부를 1년간 받도록 했다.

6월 7일, 시험 삼아 1년간 받아들이기로 한 서울의 서 바오로 신부가 어제 저녁 도착해서 오늘 아침 대성당의 임시 사제로서의 권한을 받았다.

6월 15일~10월 7일

12명의 사제 서품식. 일찍이 한국에서 없었던 가장 아름다운 서품식이었다. 다음날 점심식사 후 임지를 주었는데, 이것은 회람 제104호를 통해 모두에게 발표됐다.

17일, 새 사제들에 대한 서약과 권한 부여.

8월 9일, 교황사절의 도착(교황사절 마렐라 주교를 말함)을 이용해 나는 3개월 전 경찰에게 압수당한 성가책을 도로 찾기 위한 교섭을 시작했다.

13일, 경찰이 라틴어 책들을 돌려보냈고, 다른 책들도 돌려보낼 것을 약속했다.

10월 1일, 한일합방(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게 넘긴 사건) 25주년 경축행사. 2시까지 서울 총독부에 있었다. 나는 총독부로부터 포상을 받은 사람들과 같이 있었다. 저녁에는 플래장(Plaisant)씨 가족과 식사를 했다.

2일, 평양에 갔다. 다음날, 나는 주교미사에서 강론을 했고 서포에서 교구장들의 회의가 6일까지 열렸다.

7일, 교황사절, 다구치 신부와 같이 10시23분 평양을 출발, 8시42분 대구에 도착했다. 도지사 대표가 역에 나와 있었다.

드망즈 주교는 1935년 6월 15일 12명의 한국인 사제의 서품식을 거행한다. 스스로 ‘일찍이 한국에서 없었던 가장 아름다운 서품식’이라고 표현한 드망즈 주교의 이야기에서, 점차 늘어나고 있는 한국인 사제와 대구대교구의 미래에 대한 주교의 희망을 엿볼 수 있다.
대구신학교 준비반 학생들(1935년 5월).
1935년 당시 대구교구 주교관 모습.

정리 오혜민 기자 (oh0311@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