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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천주실의] (26) 무형한 존재인 귀신도 천주 아래의 존재일 뿐

박종구 신부(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입력일 2011-01-05 수정일 2011-01-05 발행일 2011-01-09 제 2729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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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인 기(氣)만으로는 귀신의 존재 설명하지 못해
중용·논어 구절 인용 통해 귀신과 천주 존재 대비시켜
리치가 제시한 만물의 분류표는 인간과 여타 동물 존재들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그 차이들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음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사상에서 언급된 기(氣)는 만물이 공유하는 공통적인 요소이나 형상은 모두 눈에 다르게 보인다. 그렇다면, 기(氣)에 근거한 만물은 형상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 하나로 만물의 존재를 모두 분류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부정적인 답변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과학이 발전하면서 생물의 분류법은 19세기 찰스 다윈 이후 진화론적 세계상을 확인하게 되었다. 더구나 진화론을 선행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적 범주론은 생물의 모습과 본성의 차이를 구별한다. 모습으로 사물을 구분하는 것은 본성으로 사물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以像分物, 不以性分物). 만약 겉모습으로만 분류한다면, 개의 본성과 소의 본성이 같고, 개와 소의 본성은 사람의 본성과 같다고 할 것인가?(犬之性 猶牛之性, 犬牛之性, 猶人之性歟) 이 논리는 맹자(孟子)의 고자지변(告子之辯 고자 11)에 등장한다. 인간 고유의 오상(五常-仁義禮智信)을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하는 맹자와 자연적 본능을 인간의 본성으로 주장한 고자(告子) 사이에 벌어졌던 치열한 논변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맹자의 주장에서 비판되었던 내용에 한하지만, 요점은 고자가 인간의 본성을 동물적 본능과 동일시하는 오류, 곧 인성과 동물의 본성을 동등시하는 잘못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모습이나 형태는 외적 차이를 나타내지만, 그렇다고 본성이나 본질의 차이를 말해 주는 게 아니다. 진흙 호랑이와 진흙 인간은 비록 겉모습은 다르나 본질상 진흙일 뿐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물질적인 기(氣)일 것인가? 만약 기(氣)를 정신으로 보고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주장한다면 살아 있는 것은 어째서 죽는가? 기(氣)는 사물의 안팎으로 가득한데 기(氣)가 죽는다고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리치는 이렇게 되물으며 기(氣)는 그저 지(地), 수(水), 화(火)의 요소들과 더불어 사물을 이루는 원소라고 주장한다. 기(氣)는 귀신의 존재를 구성하는 게 아니다. 무형을 특성으로 하는 귀신은 어떤 존재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리치에게 귀신은 천주의 명령을 받는 무형한 존재일 뿐이다. 귀신은 천주의 명을 받고 창조계의 일을 관리할 뿐이지, 세상의 복록(福祿)을 주는 일이나, 죄를 용서하는 일은 천주만이 하실 수 있다. 리치는 공자(孔子)의 말을 빌려 무형한 존재인 귀신과 천주(天主)의 차이를 드러낸다. 귀신의 존재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 하라’(敬鬼神而遠之, 논어 옹야편). 또 천주의 존재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天 無所禱, 논어 팔일편)는 말 등이다. 이와 같이 리치는 중용(中庸)이나 논어(論語)에서 귀신과 천주의 존재를 암시하는 구절들을 인용함으로써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한 하느님의 존재와 대비시킨다. 물론 이런 인용 방식은 심층적으로 재고해야 할 것이지만, 모든 문화에 나타나는 종교현상을 고려한다면 그리스도교의 계시 이해와 동양 경전의 신(神) 표상 방식의 관계는 충분히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박종구 신부(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