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현대순교자를 증언한다 (11) 서원석 수녀와 동생 서경석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0-11-05 수정일 2010-11-05 발행일 1999-11-07 제 2175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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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8명중 4명 공산군에 희생
32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입회
교사·성체회 지도 등 왕성한 활동
서정요의 큰 딸 원석(요셉) 수녀도 동생 안전을 걱정해 몰래 동생의 뒤를 밟아 나섰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일가족 3명이 하루밤만에 모두 공산군에게 납치, 희생되는 비극을 맞은 서원석(요셉) 수녀와 그 동생 경석(마르코).

북한 공산군이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평양 인근까지 밀려가던 1950년 10월 8일. 식구들이 모두 잠자리에 든 11시경. 아버지 서정요(프란치스코·당시 61세)가 평양시 선교리 자신이 일하던 양조회사 사택에서 북한 정치보위부원을 따라 나간지 1시간 후 셋째 아등 경석은 재차 집을 방문한 정치보위부원을 뒤따라 나섰다.

정치보위부원은 그에게 『아버지가 아직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며 『아머지가 갈만한 곳을 찾아봐 달라』고 말했고 그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보위부원을 따라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그후 그의 행방은 찾을 길이 없었다.

더욱이 보위부원의 행동을 의심스럽게 생각한 서정요의 큰 딸 원석(요셉) 수녀도 동생 안정을 걱정해 몰래 동생의 뒤를 밟아 나섰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서원석 요셉 수녀

서원석(요셉) 수녀는 1914년 4월 27일 4남3녀중 첫째 딸로 태어났다. 서수녀는 개성본당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이 운영하던 성모학교에서 5학년까지 다니다가 다시 평양 성모 보통학교에서 6학년 과정을 마쳤다. 가난 탓에 상급 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하고 있다가 1932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설립과 함께 입회했다.

수련기간을 마치고 1940년 6월 27일 요셉 수녀라는 수도명으로 첫 허원자 11명 가운데 한사람으로 허원해 수도자의 길을 밟았고 그후 보통학교 2급 정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후에 성모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사로서 바쁜 생활을 하면서도 관후리 본당에서 운영하던 양로원 일을 돕는 한편 본당 내 신심단체인 성체회 지도수녀로서 활동했다.

북한 공산정권의 박해가 노골화되면서 여러 성직자들이 납치, 체포되고 수도회도 폐쇄됐다. 수녀원이 폐쇄된 후 요셉 수녀는 친정으로 귀가해 어린 동생들과 아버지를 돌보았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행방불명되고 아버지를 찾으러 나서는 동생 경석의 뒤를 밟아 나갔다가 그도 이내 행방불명된 것이다.

서경석 마르코

서경석은 1928년 4월 25일 아버지 서정요와 어머니 여규식(마리아)의 셋째 아들로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서포에서 태어났다. 그는 4형제 가운데서도 막내 동생인 우석(요한)과 함께 유난히 총명해 부모들의 기대가 컸다. 8세 때 성모보통학교에 들어가 14세에 돌업했으나 집안이 가난해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평양시 학무과에서 급사로 일했다.

그후 평양 공업 전문학교 야간부에 입학해 학업을 계속하던 그는 2년 과정을 마치고 전기 기술자로 집안 살림을 돕게 됐다. 8.15 광복 후 서마르코는 납치 연행돼 갈 때까지 선교리에 있는 변전소에 근무하면서 부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장남 서운석 신부도 연행돼

이렇게 해서 아버지와 셋째 아들 경석, 큰딸 원석, 여기에 앞서 1949년 12월 7일에는 장남 서운석(보니파시오) 신부가 공산군에 의해 체포, 연행됐으니 한가족에 무려 4명이나 되는 가족들이 공산군에게 희생된 것이다. 이로써 남은 가족은 삼녀 예석(가밀라)와 막내 우석(요한), 그리고 폐결핵으로 투병중이던 완석 셋 뿐이었다. 둘째달 의석(아퀴노)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는 허원 1년 뒤 폐결핵으로 선종했다.

실로 서정요의 가족은 6.25를 전후해 병환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 여규식(마리아) 외 서씨와 7남매 등 일가족 8명 중에서 4명이 북한 공산군에게 희생되는 비극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