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서양자 수녀의 중국 가톨릭 교회사] (40) 경자(庚子)교난 6

서양자 수녀(한국 순교복자 수녀회)
입력일 2010-10-29 수정일 2010-10-29 발행일 1999-10-24 제 217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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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당을 침략 거점으로 인식
官지원하 무자비한 테러 자행
의화단은 북경 부근 장가촌(張家村)성당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며 보정(保定)에서 50㎞ 떨어진 곳에서 교우 50~60명을 능지처사 시켰다. 의화단이 교우들의 주택에 방화하므로 교우들은 집체생활(集體生活)을 하였다. 안가촌(安家村) 성당에서는 교우 5000여명이 모여 흙으로 성벽을 쌓고 자체 방위를 하였는데 의화단 수백명을 사살하고 대포와 총을 노획하였다. 의화단들은 각처에서 인민들을 모아 무술을 가르쳐 의화단에 가입시켰다. 영녕(永寧)은 북경과 가까운 곳인데 의화단이 교우들의 주택에 방화하고 교우들을 죽여 길에서 화장을 하므로 교우들은 놀라 성당으로 몰려왔고 청년들은 무기를 가지고 부녀자와 노약자들을 지켰다. 주(周) 신부는 교우들과 상의하여 영녕에서 12㎞ 떨어진 공간촌(孔澗村)으로 교구들을 인솔하여 갔다. 이 지역은 뒤에 산이 있고 지형상으로 보아 방어하기가 쉬우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공간촌 성당에 모인 교우가 600여명 되었는데 부녀자들과 노인들은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남자들은 창과 검을 갈고 나무토막을 지붕위에 가지고 올라 의화단에세 던질 준비를 하였다.

6월 22일 의화단이 공간촌 성당을 포위하고 교우들을 향해 『죽여라 죽여라』하고 외치는 소리가 산울림하여 교우들을 더 공포에 떨게 하였다한다. 의화단은 서양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교우들의 창과 검으로는 감당을 할 수 없었다. 의화단은 성당으로 진입하여 살육을 하고 부상을 입은 교우들은 우물 속에 넣었다. 의화단은 성당으로 진입하여 살육을 자행한 후 성당에 방화하였다. 또 많은 교구들이 산 속에 양동(羊洞) 동굴에 숨어 있었는데 양동 동굴은 길이가 40미터이고 넓이가 18미터였다. 이곳에 수백명의 교우가 숨어있었는데 공간촌 교우도 몇명 있었다고 한다. 의화단은 6월 20일 이 산을 수색하기 시작하였는데 산에 숨은 교우 80여명을 살해하고 샘줄기를 점거해 교우들이 물을 마실 수 없게 하고 양동 동굴을 포위하였다. 교우들은 재래식 총 몇 자루 뿐이었고 그들의 유일한 무기는 돌멩이였다.

의화단은 동굴 입구에 불을 질러 교우들을 질식시키려고 했는데 마침 비가 오자 불도 꺼지고 의화단도 비를 피해 갔는데 100여명의 교우가 흑야를 틈타 도망을 가는중에 의화단이 피해가는 교우들을 일일히 다 살해하였다.

천진에서도 의화단이 폭동을 일으키자 교우들은 자죽림(紫竹林) 조계(租界)에 있는 대성당으로 몰려가 무장하고 자위를 하기로 하였다. 중국인들은 교회를 중국 침략의 대본영 내지 침략의 거점으로 생각하였으며 교우들과 서양인에게 고용된 사람을 이모자(二毛子)라고 하여 사정없이 죽였다. 의화단은 천진에서 교회에 방화하였으며 프랑스, 영국, 독일 조계를 향해 대포를 발사하였다. 이때 라자리스트회 섭춘원 신부와 포다묵(包多默) 신부가 살해되었다.

산동성에 순무로 있던 반교 관리 육현(毓賢)이 산서성의 순무로 오면서 의화단은 관에 지원을 받으며 무자비한 테러 행위를 자행하였다. 산서성 순무의 보고에 의하면 의화단이 11주 6부(府) 40여현에서 테러를 하여 성당과 교회 70여개소가 방화 아니면 파괴되었다. 산서성에서는 경자교난 후 선교사가 일시 절적(絶跡)이 되었다. 산서성에서도 천주교 선교사와 개신교 선교사들이 평소 교인들을 옹호하여 교인과 일반인과 소송문제가 발생하면 항상 지방관에게 압력을 넣어 교인들이 승소하게 하였고 교인들은 서양선교사들에게 의히자여 주민들을 억압하였으므로 주민들의 원한이 쌓였었다고 한다. 양가보(楊家堡) 교우 40명이 살해되었으며 호가촌(胡家村) 성당에 교우드이 모여 기도를 하고 있는데 의화단이 들어가 전체를 살해했다고 하며 유차(楡次_에서 교우 650명이 살해되었다. 산서 순무 육현이 직접 서양신부 3명을 살해했다고 함 강주(絳州)에서는 주교가 살해되었다. 산서성의 성당이 거의 다 파괴되고 교우들이 많이 살해되었다. 태원(太原)에서는 교우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군인들을 시켜 성문을 지키게 하고 지방관 백창(白昶)이 거짓으로 교우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교우들을 안심시키고 의화단 1만여명으로 하여금 교구들을 도살하게 하여 피해자가 상당히 많았다. 의화단은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교우가 훨씬 많으므로 천주교를 더 노렸다.

서양자 수녀(한국 순교복자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