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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교회사] (10) 사막으로 간 사람들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8-25 수정일 2010-08-25 발행일 2010-08-29 제 2711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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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고독의 수도생활 통해 영적 진보
안토니우스 모범으로 탄생한 수도 공동체
가톨릭교회 떠받치는 큰 기둥으로 거듭나
부(富), 명예, 향락….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떠났다. 기원전 500여 년 경,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좀 더 높은 가치와 진리를 찾아서 고행의 길을 걸었다. 마귀가 공포와 여인, 회의감 등을 통해 수련을 방해했지만 싯다르타는 결국 보리수(菩提樹, Bodhi-tree) 아래에서 깨달음(正覺, abhisambodhi)을 얻어 붓다(Buddha, 佛陀)가 됐다. 그의 마음은 그 어떤 공포도, 고통도, 애욕도 흔들 수 없었다. 마음이 번뇌의 속박에서 해방됐기 때문이다. 이를 해탈(解脫, 참 자유)이라고 하고, 해탈한 마음에 의하여 깨우쳐진 진리를 열반(涅槃, 참 평화)이라고 한다.

부(富), 명예, 향락….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떠났다. 기원후 250여 년 경, 이집트의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난 안토니우스는 진리를 찾아서 고행의 길을 걸었다. 사탄이 공포와 여인, 회의감 등을 통해 수련을 방해했지만 안토니우스는 결국 사막에서 은총의 신비를 깨닫고 성인(聖人)이 됐다. 그의 마음은 이제 공포도, 고통도, 그 어떤 애욕도 흔들 수 없었다. 참 자유와 참 평화, 하느님 나라를 느꼈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를 고행의 길로, 안토니우스를 사막의 길로 이끈 것은 바로 ‘회심’(回心)이었다. 여기서 회심은 지금까지 걷던 길을 ‘확’바꾸는 것이다. 30°, 40°의 방향 전환이 아니다. 180° 바꾸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이러한 안토니우스의 회심은 당시 신앙에 대한 박해나 종교인들에 대한 적대감 혹은 교회 당국에 대한 실망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부 학자들은 안토니우스가 당시 가톨릭교회와 신앙인들의 미지근한 신심 때문에 환멸감을 느껴 사막으로 갔다고 하지만, 이는 틀렸다. 똑똑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절대로 남들보다 앞서 있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가 사막으로 간 것은 사회적이거나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다. “못난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가 아니었다. 오직 순수한 개인적 열망과 신비적인 비추임에 의한 것이었다.

작자 미상의 17세기 작품 ‘성 안토니우스’. 가톨릭교회가 풍랑속을 항해하고 있고, 성 안토니우스가 그 교회를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며 인도하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안토니우스의 모범으로 인해 수도회라는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기둥을 갖게 됐다.
안토니우스는 부러울 것이 없었다. 편안히 신앙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다. 부모가 죽으면서 남긴 재산이 엄청났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 전승에 의하면 성전에서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라는 말씀을 듣고 회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마을 인근 공동묘지에 기거하며 기도생활에 몰두했다. 그러자 사탄이 이를 방해했다. 유혹에 대한 이러한 처절한 투쟁의 생생한 모습은 안토니우스와 동시대 사람인 아타나시우스가 남긴, 「안토니우스의 생애」에 잘 나타난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요동쳤다. 사자, 뱀, 전갈, 늑대들이 울부짖으며 다가왔다. 유령들의 음산한 외침도 밤 하늘에 가득했다. 안토니우스가 차분한 마음으로 자리에 누워, 짐승들에게 외쳤다. ‘나를 공격해 보라.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는 이상 나는 너희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안토니우스는 그렇게 13년을 정진했다. 그러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이 그에게 지혜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러자 그는 더 깊은 사막 속으로 들어갔다. 수도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년에 두 번 마른 빵을 전달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다시 20년 동안 진정한 고독 속에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추구했다.

마침내 깨달음을 느꼈다고 생각한 그는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세상에 참 진리와 참 자유, 참 평화를 외쳤다. 그의 고결한 삶에서 참 행복을 감지한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고 이렇게 해서 가톨릭 수도 공동체가 출발한다.

거짓 빛과 달리, 참 빛은 땅 끝까지 가고, 영원히 지속된다. 안토니우스의 모범은 이후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고백록」에서 안토니우스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안토니우스의 영향은 이뿐이 아니다. 하느님과의 합치에 대한 열망이 보편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영적 진보였다. 안토니우스는 무덤조차 소유하지 않았을 정도로(그래서 지금까지 아무도 안토니우스의 무덤이 어디인지 모른다) 철저한 가난을 실천했다. 수많은 이들이 무소유의 수도생활을 통해 그의 뒤를 따랐고, 수도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도 고독과 영적 진보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든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또 청하면 실현되는 법이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수도생활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이는 다시 수도원 설립 러시로 이어졌다. 이제 수많은 이들이 수도생활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 4,32-35 참조).

그런데, 어떤 조직이든 사람이 늘어나면 룰(rule)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도원 규칙에 대한 필요성이 요청됐는데 이는 베네딕토 성인(Sanctus Benedictus, 480~543, 분도)에 의해 정립된다. 기도와 노동,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원칙, 거룩한 독서의 강조, 장상의 권위에 대한 순종 등 오늘날까지 대부분 가톨릭교회 수도원에서 지켜지고 있는 규칙들은 대부분 베네딕토 성인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렇게 가톨릭교회는 하나의 흔들리지 않는 큰 기둥을 갖게 됐다. 수도회가 그것이다. 기둥은 훗날 힘이 약해지고 또 부실해지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무너지지 않고 다른 여러 기둥들과 함께 교회를 떠받치고 있다. 뿌리가 워낙 깊이 박혀 있고, 애초에 워낙 튼튼하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때때로 약간의 보수 공사가 필요할 수는 있겠지만 절대로 철거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톨릭교회가 2000년 넘게 이어왔을 때는, 단순히 기둥 몇몇 개에만 의존해서가 아니다. 교회는 이제 또 하나의 큰 기둥을 만나게 된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