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이야기 교회사] (9) 고난을 딛고 일어서다 Ⅱ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8-18 수정일 2010-08-18 발행일 2010-08-22 제 2710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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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통해 더욱 굳건히 뿌리내린 신앙
250년 데키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제국의 대대적 박해 시작
박해로 배교자들도 생겨났지만 많은 이들이 순교로 신앙 지켜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에 따르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보존 본능’(자아본능)과 ‘성(性) 본능’(대상본능)을 가지고 있다. 이를 지극히 단순화시켜, 쉽게 말하면 ‘나를 계속 건강하게 유지하려는 본능’과 ‘후손을 번성시키려는 본능’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죽음이 자기보존 본능에 반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다른 사람을 흠집 내는 것도, 불성실한 자신에 대한 보존 본능이다. 인간이 성에 집착하는 것도 어쩌면 후손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이어가려는 자기보존 본능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변화’를 싫어한다. 늙어가는 것, 건강을 잃는 것, 사랑을 잃는 것, 직장에서 강제 퇴직당하는 것 등의 변화에 지극히 불안해한다. 영원히, 편안한 이대로의 모습으로 있고 싶어한다.

이렇게 변화를 싫어하는 것은 기득권층뿐만이 아니다. 사실 민중이 늘 개혁과 변화를 원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자본이 아닌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민중도 안정된 사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회에서는 안정된 노동활동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민중은 자신들의 보존본능에 반하는,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 호산나 외치며 예수를 환호했던 그 군중이 하루아침에 등 돌리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를 외친 것도 그래서다.

이런 점에서, 완벽한 변화를 추구했던 그리스도교는 당시 일반 민중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줬다. 특히 권력층에게는 로마 제국의 평화를 해치고, 사회 안정을 무너뜨릴 집단으로 비춰졌다. 최고 권력자는 그가 선출직이든 독재자든 누구나 민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흉내를 내는 법이다. 민중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감은 로마 권력층에게는 박해의 명분이 됐다.

로마 제국 최초의 공식적이고 대대적인 박해는 서기 250년(정확히는 249년 겨울부터다) 데키우스 황제에 의해 일어났다. 군부로부터 추대되어 제위에 오른 데키우스는 ‘그리스도교를 이대로 나두면 나중에 로마의 골칫덩어리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당시는 로마가 북방 민족(고트족)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국론을 하나로 모을 필요가 있었다. 황제가 드디어 명령을 내렸다.

“모든 로마인들은 우리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

제물을 바친 사람에게는 증명서가 발급됐다. 증명서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모두 체포됐다. 당연히 가톨릭 신앙인들은 증명서가 없었고, 수많은 이들이 체포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대 베드로 교황에 이어 20번째로 교황직에 오른 파비아누스 교황이 순교한 것도 이때다.

한번 굴러간 박해의 바퀴는 좀처럼 멈춰 서지 않았다. 박해는 데키우스 황제에 이어 제위에 오른 발레리아누스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로 계속 이어졌다. 297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이런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새로운 종교는 오래된 종교를 위협해선 안 된다. … 그래서 나는 이 새로운 종교의 지도자들을 불에 태울 것을 명하는 바다. 그 지도자들과 뜻을 함께하는 자들도 참수형에 처한다.”

칙서는 당시 완벽하게 정비된 제국 도로망을 통해 순식간에 전 지역으로 전달됐다. 제국내 대부분의 교회가 파괴됐다. 신앙 서적은 모두 수거됐으며, 불태워졌다. 종교집회도 전면 금지됐다. 물론 많은 이들이 이 박해로 교회를 떠났지만, 신앙을 버리지 않고 순교한 자들도 수천명에 달했다.

특히 동정녀 아녜스의 순교 이야기는 유명하다. 로마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아녜스는 평생 동정을 결심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청년이 그녀에게 청혼을 했는데, 아녜스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청년은 아녜스가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을 총독에게 고발했다. 온갖 고문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녜스는 오히려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신앙을 증거했으며,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한 가톨릭 신앙인은 순교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사형당하는 날은 승리의 날이었다. 그들이 감옥에서 사형장까지 가는 모습은 마치 하늘나라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두려움보다는 즐거움과 기쁨의 떨림으로 행진해갔다.”

어느 시대이건 모든 지식인들은 “우리는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쉽게 요동치고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회는 변화하고 역사는 발전하지만 그 변화와 발전은 위기에 대한 대응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교회는 박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됐다. 그림은 동정녀 아녜스의 순교 장면.
세상 모든 고난에는 끝이 있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로마의 박해도 305년 황제의 사망 이후 잠시 잠잠해진다. 그러자 이번에는 교회 내부적으로 큰 소란이 일었다. 박해는 배교자에 대한 처리 문제를 낳았다. 박해 당시 종교를 떠난 이들이 나중에 다시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왔을 때, 이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몇몇 성직자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로만 구성된 ‘그들만의 교회’를 따로 만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교황은 배교라는 중죄를 저질렀을지라도 모두 하느님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배교한 사제가 나중에 성사를 집행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도, 사제 권위는 개인적인 성스러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에 힘입어 그렇게 된다고 규정했다. 비가 온 뒤에 땅이 굳어지고, 그 굳은 땅에 물이 괴는 법이다. 그리스도교는 박해를 통해 더욱 굳게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세계사와 교회사를 뒤흔든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데, 바로 친(親) 가톨릭 로마 황제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획득한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앞서, 박해가 낳은 또 다른 열매인 수도생활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서기 200년대 후반, 몇몇 사람들이 집과 재산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사막으로 갔다. 당시까지 신앙인들은 일상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하느님 나라를 희망했으며, 그리스도가 요구한 사랑을 실천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더욱 완전한 신앙 삶을 추구하기 위해 사막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행을 하며 감각적 욕구를 억눌렀다. 왜 그랬을까.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