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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교회사] (7) 교회의 아버지들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7-27 수정일 2010-07-27 발행일 2010-08-01 제 2708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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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이교에 대항할 ‘창과 방패’ 마련
초기 교회 교부들의 업적으로
교회와 신앙 변함없이 이어져
교부들, 이단·이교 위협에서
교회 지켜낸 ‘교회의 아버지’
예수가 어린 아이를 사람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말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6-37)

전설에 따르면 예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이 어린이가 바로 이그나티우스(Ignatius, 105 이전~135경)다. 예수의 품에 안겼던 그 아이, 이그나티우스는 훗날 안티오키아의 주교가 된다.

그런데 그는 지금 로마로 압송되어 가고 있다. 사형이 예정되어 있었다. 안티오키아가 어떤 도시인가. 당시 로마 제국 동방의 최대 도시 중 하나였다. 그 대도시의 주교가 로마로 재판받기 위해 압송되고 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신앙인들이 아니다. 로마의 신자들이 동분서주하며 구명운동을 벌였다. 이그나티우스가 그 소식을 듣고 펜을 들어 로마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다.

“저를 위한 구명운동을 당장 멈추십시오. 그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의 계획은 성공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디 나로 하여금 하느님 앞에 큰 은혜를 얻게 하십시오. 순교는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순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던 이그나티우스는 이밖에도 여러 편지를 함께 작성했다. 마음이 급했다. 순교하기 전에 교회의 틀을 잡아야 했다. 당시 교회는 일엽편주(一葉片舟)였다. 아장아장 걷는 어린아이 교회는 넘어질 듯 위태해 보였다. 예수는 이미 죽고 없었고, 그 예수와 함께 식사를 나눴던 사도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교회는 자칫 진창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었다.

그는 편지를 통해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등 우후죽순 생겨나는 이단들의 주장들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정통 신앙, 즉 가톨릭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을 촉구했다. 이그나티우스는 여기서 ‘보편교회’ 즉 ‘가톨릭교회’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했다. 최근 일부 개신교 목사님들이 각종 신학강좌에서 이그나티우스에 대해 강의하는 사례를 많이 보는데, 이는 모순이다. 가톨릭교회 구원관을 기초한 인물을, 가톨릭 교회의 구원관을 거부하는 개신교에서 공부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이그나티우스의 업적은 이뿐 아니다. 주교, 사제, 부제를 엄밀히 구분하였고, 특히 주교의 권위에 대해 강조했다. 로마 교회의 우월성과 교황의 수위권도 언급했다. 이그나티우스가 없었다면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오는 정통 가톨릭 신앙의 틀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교회와 신앙을 수호한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간 직후,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됐다.

이러한 사도 교부들의 바통은 호교 교부들로 이어진다. 호교 교부들은 교리에 대한 비판에 적극적으로 맞서 교회를 옹호한 분들이다. 유스티누스(Iustinus, 100/10경~165)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그리스 철학 사상으로 완벽 무장했다. 그 힘으로 그리스도교가 그리스 로마 세계에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했다. 철학과 논리를 통해 신앙을 증거해낸 것이다. 이들은 신론, 그리스도론,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켰고. 성경 연구를 주도면밀하게 진행했다. 특히 2세기 교회의 전례, 신앙,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신생교회 선교활동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들의 업적은 컸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가 뿌리를 내리기로는 이들의 연구와 기도만으로는 부족했다.

2세기 가장 위대한 가톨릭 신학자로 불리는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왼쪽)와 정통 가톨릭 신앙의 틀을 세우고, 순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던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그나티우스. 교회는 이러한 교부들의 도움으로 정통 교리를 정립하고 수호하며 신앙을 지켜올 수 있었다.
사도 교부들과 호교 교부들은 그때 그때 대두되는 문제에 대응했다. 이들은 교리 전반적 문제에 대해선 다루지 않았다. 군사용어로 말하자면 각개전투에만 임한 것이다. 하지만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각개전투에서의 승리만으로는 부족하다. 전략과 전술이 어우러진 종합 각개가 필요하다.

교리 체계를 전반적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 맨 앞줄에 서 있는 사람이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Irenaeus, 130/40~200/202경)다. ‘이레네오’라고도 불리는 이레네우스가 없었다면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교리 체계가 성립할 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가톨릭교리의 수호자’‘2세기 가장 위대한 가톨릭신학자’로 불리는 이유다.

이레네우스의 신앙 족보는 화려하다. 신라시대 골품제도로 말하자면 성골(聖骨)이다. 그의 스승은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167)이고 폴리카르푸스의 스승은 사도 요한이다. 사도 요한은 당연히 예수로부터 직접 사사받았다. 이레네우스가 예수로부터 이어내려 오는 정통 교리 전수자임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진리에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다혈질적이었던 평신도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경~220 이후), 학자풍의 차분한 논쟁가였던 아프리카 최초의 순교자 치프리아누스(Cyprianus, 200/210경~258), 성경학자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345?~419?), 신은 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이므로, 신을 찾고자 한다면 굳이 외계로 눈을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 속으로 통찰의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등이 있다.

이들이 교회에 남긴 영향은 지대하다. 사제직 신학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60경~215 이전)에게서 최초로 나타났다. 성찬례에 대한 심오한 분석은 테르툴리아누스와 에우세비우스(260/64~339/340)에 와서 더욱 분명하고 심오하게 발달되었다. 가톨릭과 개신교 공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교회는 지금까지 신앙이라는 공격용 창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교부들의 도움으로 이단과 이교에 대항할 방패까지 갖췄다. 창과 방패를 갖춘 병사(신앙인)들의 사기는 높았고, 게다가 그 병사들의 수도 갈수록 증가했다. 신앙이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 교부(敎父)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정립한 초기 교회의 스승들을 교부, 즉 ‘교회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라틴어로는 ‘빠떼르 에끌레시애’(Pater Ecclesiae)다.

‘아버지’라는 말에서는 권위가 읽혀진다. 엄정함, 이끄심, 가정의 든든한 울타리가 연상된다. 물론 교부들 스스로는 교회의 아들을 자처했다. 하지만 교회가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은 그만큼 이들에 의해 교회가 자리 잡고, 유지되고, 성장했기 때문이다.

교부로 분류하는 기준은 교리의 정통성, 생활의 거룩함(聖性), 교회의 승인, 고대성 등이다. 학자에 따라 사도 교부와 호교 교부를 교부 분류에서 제외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 글에선 함께 다뤘다.

우리는 사도시대 직후,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수호한 이들을 ‘사도 교부’라고 부르고, 사도 교부에 이어 교회 신앙을 보호한 이들을 호교 교부라고 한다. 이들은 그때 그때 주어진 신학적 문제와 논쟁들에 대항했는데, 이후 교리 전반적 체계를 수립한 이들이 바로 교회 교부들이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