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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교회사] (6) 아찔했던 순간들 Ⅱ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7-21 수정일 2010-07-21 발행일 2010-07-25 제 2707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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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후죽순’ 생겨나는 이단·이교들
율법 규정으로 인한 유대인-이방인 갈등 문제 정리됐지만
아리우스·마르치온 등 이단·이교들 난립하면서 교회 위협
바오로 사도가 단단히 화났다. 베드로 사도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엄중하다.

“당신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단죄받을 일을 했습니다. 위선적이십니다.”(갈라 2,11-14 참조)

문제의 발단은 먹는 일, 곧 ‘식사’(食事)였다. 바오로가 먹는 일로 쩨쩨하게 베드로에게 화를 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식사만큼 공동체의 결속력을 공고히 하는 것도 드물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함께 식사를 나눈 사람이 주인 집 물건을 훔쳐서 도망갔을 경우, 주인은 하루가 지난 다음에야 추격을 시작했다. 함께 나눈 음식이 뱃속에 남아있는 동안에는 서로 한 형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를 볼 때 초기 교회 신자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베드로도 안티오키아 교회에 왔을 때, 처음에는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했다. 그랬던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그리스도교인들이 왔을 때 태도를 확 바꾼다.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고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바오로가 화를 낸 이유다. 물론 베드로의 이런 행동은 다른 유대인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배려였을 것이다. 교회 전체의 선익을 위한 판단이었을 수도 있다. 이방인의 밥상에는 유대인이 먹지 말아야 할 음식들이 있을 수 있었다. 유대인이 식사 규정에 어긋나는 음식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오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실 골수 유대인은 어부였던 베드로가 아니라 바리사이파였던 바오로다. 그런데 엄격한 율법 준수가 그리스도가 선포한 복음에 맞지 않는 옷이라고 생각한 것은 바오로였다. 결국 바오로는 이 일을 계기로 율법이 아닌 믿음을 통한 구원을 더욱 강조하게 된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 율법을 통하여 의로움이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갈라 2,15-21)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어정쩡한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한 것이다. 만약 바오로의 완고함이 없었다면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율법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적절히 섞인 종교로 변질됐을 수도 있다.

이후에도 교회는 아기가 걸음마를 떼듯 불안한 모습을 계속 보인다. 물론 아기의 손을 잡아주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지만, 홀로 설 수 있는 튼튼한 다리를 가질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기의 발걸음을 위태롭게 만든 것은 이단과 이교였다. 물론 이단과 이교는 아기가 좀 더 잘 걸을 수 있도록 하는 촉진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말이 나왔다. 이단은 뭐고, 이교는 또 뭔가.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고 넘어가자.

교회법에 의하면 이단이란 세례 받은 신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할 진리를 완강히 거부하거나 의심하는 것이다(751조). 이단의 성립에는 세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첫째 그가 세례 받은 신자여야 하고, 둘째 가톨릭 교의에 관하여 오류나 의심이 있어야 하며, 셋째 오류나 의심을 지속하자고자 하는 의지가 표현되어야 한다(교회법 1364조). 이러한 이단은 초기 교회 당시부터 이미 예언됐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끌어들이고, 심지어 자기들을 속량해 주신 주님을 부인하면서 파멸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2베드 2,1)

그런데 이교는 약간 다르다. 이교는 가톨릭교회 주교의 합법적인 권위에 순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교회의 친교에서 이탈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점에서는 이단과 이교가 같지만 그 원인이 이단은 교리에 대한 반대고, 이교는 교회의 지휘에 대한 거부에 따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얼굴을 대면하고 살았던 사도들이 하나 둘 선종하면서, 갖가지 이단과 이교가 난립하기 시작한다. 비가 온 뒤에 여기저기 솟는 죽순(우후죽순, 雨後竹筍)이었다. 교회의 위기였다.

가장 강력한 이단 혹은 사상적 사조를 우선 꼽으라면 영지주의(그노시스)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육화 교리를 부정했다.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몸은 죄로 가득찬 악(惡)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단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영(靈)이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가현설(docetism)이다. 이후 교회는 12개 정도의 영지주의 분파와 고난한 싸움을 해야 했다. 영지주의 성향의 주교가 이끄는 교구와 그렇지 않은 교구들 간에 물리적 충돌도 있었다. 이때 만약 교회가 영지주의에 밀렸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참 진리를 영원히 접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4세기 경의 이단, 아리우스 주의도 그 세력이 대단했다. 이들은 성자가 단지 피조물과 신의 중계역할을 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상은 북부 게르만 민족들에게 전파되었고, 게르만족의 로마 진입과 더불어 로마제국 전역에 퍼져 나갔다.

마르치온 이단도 하나의 큰 도전이었다. 그리스의 지식인이었던 마르치온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후 로마에서 자신만의 학설을 주장했다. 그리스 철학 논리로 무장한 탓에 논쟁에서 좀처럼 밀리지 않았다. 철저히 유대교를 배척한 그는 구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직 바오로 서간만을 성경으로 인정했다.

이 밖에 자신을 예수가 약속한 성령이라고 주장하며 인도와 페르시아까지 사상을 전파한 마니의 마니교, 철저한 도덕적 자각과 금욕을 강조하고 천년왕국이 목전에 왔다는 몬타니즘, 성자의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성부와의 위격적 구별을 부정하는 모나르키아 주의, 십자가에서 수난 당한 것은 성자가 아니라 성부라고 주장한 사벨리우스 주의 등 이단은 수도 없이 생겨났다. 또한 초기 교회부터, 교황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많은 이교들도 생겨났다. 로마와 거리가 먼 소아시아와 동방 교회들 중에 특히 그런 사례들이 많았다.

이에 사람들은 참 진리가 무엇인지 헷갈려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고난의 시기에는 항상 영웅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단과 이교가 여기저기서 생겨나면서 교회 영웅들의 활약도 함께 시작된다. 우리는 그들을 교부(敎父, Pater Ecclesiae), 즉 ‘교회의 아버지’라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와 얼굴을 대면하고 살았던 사도들이 하나 둘 선종하면서 갖가지 이단과 이교가 난립하기 시작한다. 비가 온 뒤에 여기저기 솟는 죽순(우후죽순, 雨後竹筍)이었다. 교회의 위기였다. 그림은 자신을 예수가 약속한 성령이라고 주장하며 인도와 페르시아까지 사상을 전파한 마니와 그 제자들을 묘사한 벽화.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