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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교회사] (5) 아찔했던 순간들 Ⅰ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7-14 수정일 2010-07-14 발행일 2010-07-18 제 2706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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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 받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
‘할례’ 문제로 생긴 안티오키아 교회의 분쟁 해결 위해
예루살렘 사도 회의 열고 이방인들 위한 별도 규정 마련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였다. 엄청난 빛이었다. 그 순간 사울이 쓰러졌다. 쓰러진 사울의 귀에 음성이 들려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사도 9,5-6)

사울은 일어섰다.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마을로 부축해 데리고 갔다. 사울이 받은 정신적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는 물을 마시지도,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그때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사울을 찾아왔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사도 9,17)

하나니아스가 사울에게 안수를 했을 때였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시력이 돌아왔다. 이후 사울은 완전히 달라진다. 살기를 띠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그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기 시작했다(사도 9,20).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눈이 보이지 않다가 보게 됐고, 쓰러졌다가 일어섰다. 180도 확 변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정반대의 길을 새로 간다. 인간적 시각으로 볼 때는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바리사이파라는 보장된 직위가 있었다. 로마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리스어, 히브리어, 아람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재원이었다(사도 21,3722,2). 명예와 부, 안락한 삶도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울은 그 모든 인간적 안락함을 버린다. 사울은 이제 바오로 ‘사도’가 된다. 다마스쿠스의 유대인들은 당황했다.

“저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자들을 짓밟은 자가 아닌가? 또 바로 그런 자들을 결박하여 수석 사제들에게 끌어가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닌가?”(사도 9,21)

당혹스러운 감정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유대인들은 바오로를 없애 버리기로 공모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바오로 사도는 밤에 몰래 성벽에 난 구멍으로 탈출해야 했다(사도 9,25 참조).

탈출에 성공한 바오로는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을 찾았다. 그러나 사도들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한다.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바오로를 변호하고 나선 사람이 바르나바다. 키프로스 출신이었던 그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사도 11,24). 그는 직접 바오로와 사도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그동안 일어난 일을 설명했다. 그제야 사도들은 바오로를 받아들였다. 바오로의 열정은 선배 사도들 못지않았다. 바르나바는 이후 바오로를 안티오키아로 불러 그에게 선교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으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도중에 예수를 만났다. 이후 그는 완전히 달라진다. 모든 인간적 안락함을 버리고 ‘바오로 사도’로 거듭났다. 그림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묘사한 Hans Speckaert의 작품.
여기서 우리는 안티오키아 교회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안티오키아는 이방계 그리스도교 선교의 거점 역할을 한 도시다. 따라서 안티오키아에 대해 알지 못하고 성경을 읽으면 아무리 읽어도 그 맥을 읽을 수 없다.

현재 안타키아(Antakya)로 불리는 안티오키아는 터키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다. 지금은 쇠퇴했지만 사도 시대에는 대도시였다. 그만큼 재원도 풍부했다.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신자들이 기근으로 고생할 때 안티오키아 교회가 구호품을 보냈을 정도로(사도 11,27-30 참조) 안티오키아 신자들은 상대적으로 넉넉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 도시를 예루살렘 다음으로 그리스도교 선교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다. 이 도시의 영향력은 이곳 신자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사도 11,26)에서도 잘 드러난다. 큰 도시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보편적인 언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표준어도 서울을 기준으로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문제가 터졌다. 그 내용은 사도행전 15장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발단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계 그리스도교인들이었다. 갑작스레 안티오키아에 온 그들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사도 15,1)고 했다.

청천벽력이었다. 안티오키아 신자들 중에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많았다. 유대인이 아닌데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니…. 물론 이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예수도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었다. 예수도 율법을 지켰는데, 그 제자들이 율법을 엄수해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당장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이 문제를 두고 사도들과 회의를 한다. 이것이 이른바 가톨릭교회 제1차 공의회인 예루살렘 공의회다.

공의회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구원을 위해서는 할례보다 신앙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바리사이파에 속하였다가 신앙을 갖게된 이들의 주장은 단호했다.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고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해야 합니다.”(사도 15,5)

의견과 의견이 부딪쳤다. 해결점이 보이지 않았다. 이때 교회의 반석, 베드로 사도가 중재에 나섰다. 묵직하고 권위가 있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사도 15,8-11 참조).

베드로 사도는 바오로 사도의 손을 들어줬다. 이렇게 해서 이방인의 경우, 율법을 엄격히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이 같은 내용을 정리한 최초의 공의회 문헌을 안티오키아 신자들에게 보냈다. 문헌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 않을 것, 불륜을 멀리할 것 등 몇 가지 기본적 지시사항만 들어있었다. 안티오키아 교회 신자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만약 베드로 사도가 바오로 사도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예비신자 교리를 마치고 세례를 받는 그 순간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까다로운 음식규정으로 인해 맥도널드 햄버거도 먹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 앞서 아마 가톨릭 교회는 보편 종교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그런 유대교내 소수 종파 중 하나로 그쳤을 가능성이 크다. 교회에는 늘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다시 한 번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런데…. 아찔했던 순간은 이뿐 아니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