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이야기 교회사] (4) 아! 스테파노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7-07 수정일 2010-07-07 발행일 2010-07-11 제 2705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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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의 위협에도 담대하게 신앙 증거
교회의 급속한 성장에 불안감 느낀 유대교 지도자들
스테파노를 시작으로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 자행
성난 파도가 훌륭한 뱃사람을 만든다. 잔잔한 바다만 경험해서는 절대로 1급 항해사가 될 수 없다. 명검(名劍)이 탄생하기 위해선 쇠망치와 불의 단련이 있어야 한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 그렇게 굳은 땅에 물이 괸다.

작가 박경리(1926~2008)의 「토지」가 가능했던 것은 극한 고통에 대한 체험과 생명에 대한 경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작가 박완서(1931~)를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유도 그의 글 자체 때문이 아니다. 그가 겪은 고통의 깊이 때문이다. ‘고통’(惡)이 승화될 때,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적 도약’(善) 또한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신비’다.

그 고통이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교회’에도 찾아온다.

“예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사도 4,18)

최후 통첩이다. 유대교 최고 의회(산헤드린)가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놓고 엄중 경고했다. 더 이상 복음을 선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이 말을 귓등으로 흘린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정면 도전이다. 이에 유대인들은 분노했다. 당장이라도 사도들을 돌로 쳐 죽일 태세였다. 그때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 가말리엘이 일어섰다. 그는 일단 사도들은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일단 그냥 내버려 둡시다. 저들의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사도 5,34-40 참조).

사도들은 일단 위기를 넘겼다. 실제로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잠시 저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가톨릭교회는 소멸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의 선포와 그의 부활 소식은 순식간에 전 유대 사회를 휩쓸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의 속주 총독으로 재직하던 플리니우스가 112년경 로마 황제와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당시 교세의 급속한 성장세를 엿볼 수 있다. 편지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로 고발당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보고한 플리니우스는 또 “나이나 지위와 성별에 관계없이 앞으로 줄어들기보다 계속 늘어날 추세”라며 “이제는 도시만이 아니라 지방까지도 이 광신에 오염되고 있다”고 적었다.

좋은 일은 많이 일어나도 문제다. 교회는 교회대로 늘어나는 신자수로 큰 문제에 봉착했다. 처음에는 사도들이 직접 신자 조직 관리를 맡았지만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차츰 그것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신자들을 위한 식탁 봉사 등 관리 업무를 도와 줄 협조자(부제) 7명을 뽑았다. 이들의 이름은 스테파노,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니콜라오스 등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테파노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바로 가톨릭교회 최초의 순교자이기 때문이다. 스테파노는 열정적으로 교회 일에 임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보고 배운대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복음을 세상에 선포했다. 그런 그를 유대사회가 가만히 두고 있었을리 만무다.

쟁기를 어깨에 메고 들판을 터벅터벅 걷던, 사도들의 선포를 까치발로 듣던 그 스테파노가 최고 의회에 끌려왔다. 유대 사회를 붕괴시키려 했다는 죄목이었다. 하지만 스테파노는 더 이상 예전의 무기력했던 농부가 아니었다.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최고 의회에서 유대교 원로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담대하게 외친다.

“여러분은 천사들의 지시에 따라 율법을 받고도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도 7,53) 스테파노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분노한 유대인들은 달려들어 스테파노를 포박했다. 그리고 성 밖으로 끌고 갔다. 겉옷은 벗겨서 사울이라는 젊은이(훗날 바오로 사도) 앞에 두었다(사도 7,58). 그리고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피가 튀었다. 하지만 스테파노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기도였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처참한 죽음이었다….

스테파노는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성령에 사로잡힌 그는 유대교 원로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담대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그림은 안니발레 카라치가 그린 〈성 스테파노의 순교〉.
교회의 고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요한의 형제였던 대 야고보 사도의 머리가 잘렸다(42년). 끝까지 예루살렘에 남아 교회를 이끌던, 초대 기둥들 중 하나(갈라 2,9)였던 알패오의 아들(마태 10,3) 소 야고보 사도도 모세의 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대제관 아나누스에 의해 62년에 돌에 맞아 죽었다. 같은 운명에 처했던 베드로 사도가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탈출한 것(사도 12,6-19)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제 신앙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교회의 기반이었던 예루살렘 공동체가 거의 무너졌다. 하지만 이것은 단련을 위한 고통이었다. 더 큰 성장을 위한 웅크림이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도들과 신자들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들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라는 약속을 믿었다. 그래서 발길이 닿는 곳마다, 복음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인들의 믿음을 코웃음 치며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다. 바리사이파이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지식인이었던 사울은 스테파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직도 스테파노가 죽어가면서 보였던 결연한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을 놔뒀다가는 유대교 중심의 사회질서에 중대한 위협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사울은 교회에 대한 박해에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는 한번 하겠다고 결심하면 반드시 이뤄내는 성격이었다.

사울이 보인 것은 살기였다(사도 9,1 참조). 사울은 대사제에게 가서 각지로 흩어진 신앙인들을 잡아오겠다고 말했다.

“(신앙인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습니다.”(사도 9,2)

그리고 즉시 행동에 나섰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사도 8,3)

그러던 중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사울이 예루살렘을 떠나 다마스쿠스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