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중국 가톨릭박해사] (24) 아편전쟁 후의 천주교

서양자 수녀ㆍ한국순교복자수녀회
입력일 2010-07-02 수정일 2010-07-02 발행일 1998-01-18 제 2086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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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주교난 주민들이 성당 방화ㆍ신자 주택 파괴
두차례 박해…프랑스공사, 주범 체포 요구 서양교난
준의교난「농신제사」발단…주민과 신자 충돌
형주(衡州)교난

다른지방에서 반교 전단(傳單)이 들어오고 반교 분위기가 확산되어 가고 있을 때 형주(衡州)에 열심한 교우들이, 북문(北門)이 원래 십자가(十字街)인데 십자가(十字架)를 범하는 일이라 하여 꺼리다가 마침 내 민가를 사서 헐어 십자가(十字架를 변형시키려다가 주민들과 충돌이 생겼으나 다행히 오래지 않아 가라 앉았다. 교우가 사망하여 출상(出喪)을 하려는데 어린 아이들이 재를 십자가형으로 길에다 뿌리는 장난을 하였다. 교우들이 이것을 보고 어린 아이들이 부모를 끌고 와서 보이고 서로 구타하며 싸움까지 하였다. 교우들은 민간신앙인 성황묘(城皇廟)를 개조하여 십자가를 걸어 놓고 교우들의 모임 방으로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주민들로 하여금 천주교에 대해 불만을 갖게하였다.

형주에 안탑(雁塔)이 있는데 교우들이 서양선교사들을 안내하여 서양선교사가 안탑에서 망원경으로 내려다 보고 지도를 그렸다. 영국을 비롯하여 서양 열강들이 중국에 아편을 팔고 불평등 조약후에 외국 상품이 밀려들어와 중국의 자연경계는 무너지고 실업자가 속출 하므로 서양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데 서양 선교사가 안탑에서 지도를 그렸으므로 주민들이 이 일에 대해 분개하였다. 주민들은 서양선교사들을 구축하고 성당을 없애버리자는 서명운동을 하고 서명한 것을 순무에게 보내고 1862년 4월 3일 성당에 방화하고 교우들의 주택을 파괴하였다.

유양(酉陽)교난

사천성은 금교시대부터 천주교의 최대의 거점이었고 내지 선교 공인후에도 교세가 확장되었으며 그 때문에 구교운동이 아주 격렬하였다. 사천성 유양(酉陽)은 사천 동쪽에 있으며 사천과 귀주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또한 수은, 단사, 면포, 동유 등이 생산되는 경제적으로 앞선 지역이다. 귀주의 반교 영향을 받아 검비(鈐匪)라고 불린 반란 집단이 활동하였으며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자주 무장 세력인 민단 세력이 강하게 편성된 곳이다. 천주교 박해자 전흥서가 신강으로 유배를 갈 때 이곳을 경유하였는데 영웅 대접을 해 준 곳이기도 하다. 관청에는 공공연하게「주멸천주교(誅滅天主敎)」「참초제근(斬草除根)이라고 써 붙여 있었다.

유양에서 1865년 1868년 두 차례에 걸쳐 교난이 일어났다. 1865년 교난은 풍사은 등이 수백명의 군중을 이끌고 깃발을 높이 세우고 교우 주택을 파괴하고 교우들을 체포하여 배교를 강요하였다. 풍문원 등은 주민 여러 명을 이끌고 와서 교우들을 위로해 주기 위해 온 프랑스 마빌로 신부를 살해하였다.

각 성에서 교우들이 자녀 결혼문제에 있어서 상대방이 교우가 아니라 하여 정혼을 했다가 파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제2차 교난은 1868년 교우 용수원이 비교우 집에 파혼을 요구하여 일어났다. 민중들이 분노하여 교우와 소송문제로 구속된 앙정정 등을 구출하고 프랑스 리고 신부를 살해하였다. 지방계 성당에 중국인 담보신 신부는 포대와 보루를 설치하고 폭도화한 민중들과 무력으로 싸우다가 민단원 1백21명과 부녀 24명이 죽고 부상자가 7백여 명이나 발생하는 소규모 전투의 양상을 보였다. 천동주교는 주범 체포와 처벌을 요구했으나 이 사건은 1년이 넘게 끌었다. 프랑스 공사는 하북, 하남, 강서, 각 성의 미결 교난을 기한내 해결하고 구교운동을 진압하지 않으면 병선을 파견하여 실력으로 주범을 체포하겠다고 하였다. 청정부는 급히 사형 1명을 장형(丈刑) 2명과 8만냥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였는데 이름 없는 민중을 대신 처형하였다. 1866년 복건성 천주에서 그 지역의 유지들이 군중들을 이끌고 가서 성당을 파괴하였다.

준의(遵義)교난

프랑스 신부가 귀주성 준의(遵義)에 들어와 1866년 민가를 세를 내어 임시로 성당으로 사용하다가 1867년 양유가에 민가 여러 채를 사서 허물고 성당을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입교자 중에는 서양 선교사들의 세력에 의지하기 위해 무뢰배, 떠돌아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1869년 5월 단오에 주민들이 농신(農神)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교우들이 미신적인 행사를 한다며 신상을 부수고 표문을 찢었다고 한다. 흥분한 민중들이 성당을 파괴하고 의원(醫院)을 파괴하였다.

「준의교난」「천진교난」「유양교난」은 전국 각지 교난을 잇따르게 하였다. 1869년 직예성 영년현의 무사 위장경은 성당의 십자가를 부수고 성당 기물을 파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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