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이야기 교회사] (3) 태동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6-30 수정일 2010-06-30 발행일 2010-07-04 제 2704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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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과 함께 시작된 가톨릭교회
오순절, 성령으로 가득찬 사도들의 힘찬 복음 선포에
함께 기도하고 함께 생활하는 초대 교회 공동체 탄생
독특했다. 예수는 뭔가 달랐다. 한국축구를 닮았다. 늘 예상을 깬다. 그는 여느 지도자들과 달랐다.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마태 6,11)라고 기도하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다.

거느린 제자들도 모두 가난뱅이였다. 로마로 귀화한 유대인,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 ~ 100?)의 당시 기록에 따르면 1세기 티베리아에서 일어난 생계형 폭동은 어부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위경인 「나자렛 사람의 복음」에서도 제베대오(요한과 야고보의 아버지)가 가난한 어부로 묘사된다. 시몬과 안드레아도 한 집에 살아야 했을 정도로 가난했다(마르 1,29 참조).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어야 했을 정도로 극도로 굶주렸다(마르 2,23-28마태 12,1-8루카 6,1-5 참조). 가난했으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을리 만무하다.

예수는 이처럼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가갔고, 함께했다. 그리고 희망을 심어 주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라고 선언했다. 더 기막힌 것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말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예수가 어울린 사람들은 세리와 창녀(마태 21,31), 이방인(마태 18,17), 죄인(마르 2,16-17) 등 평판 나쁜 사람들 일색이다.

오순절, 예수의 그 가난한 제자들이 지금 다락방에 모여있다. 명단은 다음과 같다.

‘시몬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아, 필립보, 토마스,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사도 1,13).

예수를 배반하고 죽은 ‘유다 이스카리옷’의 자리는 베드로의 제안에 따라 별도로 선발된 마티아로 채워졌다(사도 1,15-26).

이들은 10일 전의 감동과 환희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예수는 50일 전 부활한 후 40일간 지상에 머물며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가르쳤다. 그리고 ‘다른 보호자’(요한 14,16)인 성령이 오실 때까지 유대교의 심장인 예루살렘에 머물 것을 명령하셨다. 그리고 10일 전에 제자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다. 장엄한 모습이었다.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 이후 뿔뿔이 흩어질 위기에 처했지만, 스승의 부활과 승천은 그들을 다시 묶어주는 계기가 됐다.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 힘든 그 기적 앞에서 제자들은 다시 하나가 됐다. 그들은 특히 스승이 승천하며 남긴 ‘큰 약속’ 하나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성령강림과 함께 가톨릭교회가 출발한다. ‘가톨릭교회’라는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림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묘사한 이탈리아 파도바 스크로베니 경당의 프레스코화.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하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어리둥절이다. 부활하신 몸으로 그냥 영원히 함께 옆에서 있어 주셨으면 좋겠는데, 떠나셨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저 막막한 심정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방법 이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날 아침이었다. 역시 스승은 약속을 어길 분이 아니었다. 햇살이 창 안으로 은은히 번지고 있었다. 방안에는 기대와 호기심, 평화와 불안이 공존했다. 그런데 그 의구심을 세찬 바람이 깨운다. 흔들어 깨운다. 곧이어 강렬한 불꽃이 일었다. 혀 모양이었다. 그 불꽃들이 제자들에게 내려앉았다. 약속은 성취됐다. 제자들은 성령으로 가득찼다.

가톨릭교회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교회는 이렇게 성령의 오심과 함께 출발했다. 성령의 능력은 놀라웠다. 지금까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제자들이 거리로 뛰어 나가 진리를 선포하기 시작했다. 유대교가 정통 종교로 인정받던 사회다. 그 유대교의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그것도 벌건 대낮에 길거리에서 공식적으로 신앙을 선포한다는 것은 제정신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사도들의 이런 모습을 일종의 해프닝으로 받아들였다.

“포도주에 취했군.”(사도 2,13)

하지만 사도들은 취하지 않았다. 오전 9시, 우직한 어부 베드로가 군중들 앞에 섰다. 가톨릭교회 제1대 교황의 첫 설교가 이어진다. 감동적인 장면이다.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14-36 참조)

그러자 사람들이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드로가 대답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사도 2,37-41 참조).

베드로의 설교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3000여 명이 개종했다. 당시는 모든 사람이 종교를 가지고 있었던 시대였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교육받지 못한, 어리숙한 베드로의 설교 한마디에 3000여 명이 개종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성령 강림 → 사도들의 변화 → 신앙 공동체의 등장 → 공동체에 대한 성령의 임하심 → 공동체의 성장.’

이제 성령의 선순환 고리가 만들어졌다. ‘가톨릭교회’라는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신자들이 늘면서, 공동체 생활도 차츰 자리를 잡아갔다. 독특한 조직이었다. 신자들은 함께 기도하고 함께 생활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았다(사도 4,32-37). 궁핍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는 불교의 초기 모습과 똑같다. ‘상가’(Samgha)로 불리는 원시불교 공동체는 함께 일하고, 물질적 이익을 공평히 분배했다. 그런데 초기 교회의 재산 공동소유는 의무사항이 아니었다(사도 5,3-5). 그래서 집단주의나 공산주의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그 재산공유가 자발성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한 사도가 복음을 전하고 있다. 성령에 충만한 모습이다. 목소리, 손짓 하나 하나에 확신이 가득하다. 이야기를 듣기위해 수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다. 쟁기를 어깨에 걸친 한 농부가 뒷줄에서 까치발을 하고,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말씀 하나가 농부의 가슴을 파고든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참조).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