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이야기 교회사] (2) 술렁임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6-23 수정일 2010-06-23 발행일 2010-06-27 제 2703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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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한 서민들에게 들려온 부활 소식
과중한 세금·거짓 예언자의 선동 등 혼란한 가운데
십자가 사형된 나자렛 예수 살아났다는 소문 퍼져
흙먼지가 풀풀 일었다. 한 농부가 터벅터벅 길을 걷고 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 아래서 뿌연 먼지가 일었다 가라앉았다.

어깨엔 쟁기가 힘없이 걸쳐져 있었다. 가나안 땅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쟁기였다. 땅의 습기가 보존될 수 있도록 땅의 표면만 긁어내도록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서유럽 농부들이 사용하는 쟁기처럼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농부는 입에서 하르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머리가 복잡했다. 최근 가나안 땅 이곳저곳에서 메시아와 예언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서로 자신들이 ‘진짜’라고 외치고 있었다. 농부는 과연 어떤 사람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구원을 위해 오신 진정한 예언자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한때 창녀와 병자들과 어울린다는 나자렛의 예수라는 사람을 가장 신뢰했지만, 그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이런 와중에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었다.

40여년 전 시작된 헤로데 대왕의 과도한 건설 경기 부양이 화근이었다. 헤로데는 부족한 식량을 이집트 등 외국에서 모두 수입하고, 오직 건설 및 건축에만 열을 올렸다. 농업 기반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살길을 잃은 청년들이 농촌을 떠나 성전 건축 등 각종 건설 현장에 몰려갔다. 그들은 대대로 내려오던 농사일을 그만두고 석공, 은세공업자, 유향 제조업자 등으로 일했다.

그나마 농촌에 남은 이들은 과중한 세금 때문에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헤로데와 그 자손들은 로마에 보낼 조공을 거둬들이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했다. 남자는 만 14세부터, 여자들은 만 12세부터 조공의 의무를 졌다. 당시 국민 총생산에서 조세비용이 차지하는 비율은 12~50%에 달했다.

이뿐 아니다. 꼬박꼬박 성전세도 내야 했다. 십일조 등 제사장 생계를 위한 세금도 농부들의 몫이었다(루카 18,12 참조). 이 밖에도 토지세와 인두세 등 직접세, 각종 수수료와 강제부역으로 농부들은 이래저래 죽을 판이었다.

훗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Ioannes Chrysostomus, 349~407)는 당시 가나안 백성들의 비참함을 이렇게 썼다.

“이 불쌍한 시골 사람들처럼 자비가 필요한 이들이 또 어디 있을까. 그들은 겨울 내내 장마와 추위로 고통받는다. 게다가 지금 그들은 빈털터리에다가 빚더미에 앉아있다. 그들을 떨게 하는 것은 굶주림이나 흉작만이 아니다. 감독관들의 학대, 소환, 체포, 책임추궁, 소작료 독촉도 견뎌내야 한다. 이 사람들이 당한 일들과 불이익을 모두 열거할 수 있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농부들의 땀과 노동의 결과로 지주들의 창고와 저장소는 가득 찼으나, 정작 농부들은 조금도 그 소출을 집으로 가져갈 수 없다. 지주들은 모든 소출을 자기 금고에 쌓아두고, 농부들에게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을 급료라고 던져 준다.”

스위스 바젤대학교의 신약학 교수, 에케하르트 슈테게만(1945~)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에서 “1세기 당시 한 사람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돈은 연간 70데나리온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6인 가구라면 연간 420데나리온이 필요한 셈이다. 그런데 시카고 대학의 벤 다비드(Anan ben David) 박사에 의하면 당시 하층 농민들의 연간 평균 수입은 5~6인 가구 기준, 200데나리온이었다. 100만 원이 필요한데 50만 원 밖에 벌지 못한 것이다.

200데나리온은 빵 2400개를 살 수 있는 돈이다. 만약 식구가 6명이라면 한 명당 1년에 빵 400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1년이 365일이니까 당시 농민의 가족들은 하루 빵 1개로 생계를 이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옷도 입어야 하고, 집도 지어야 하고, 학교도 가야 한다. 당시 웃옷 한 벌이 12~20데나리온이었다고 한다. 이는 빈민층 평균 연봉(200데나리온)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오늘날 1500만 원 연봉을 받는 사람이 150만 원 하는 옷을 사서 입어야 하는 형편과 같다. 당시 농부들이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반면 부유한 이들은 연간 평균 소득이 15만 데나리온에 달했다. 청렴하기로 소문난 로마의 키케로도 연 수입이 2만 5000데나리온에 달했다.

사람은 굶주림은 버틸 수 있다. 하지만 굶주리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이 배불리 먹고 있는 것을 태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적다. 민중들의 불만은 차츰 극에 달하고 있었다. ‘확 바꿔버려’사회심리가 팽배했다.

사회가 불안하면 선동가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혼란한 사회 분위기에 편승, 수많은 이들이 예언자와 메시아를 사칭하고 나섰다.

소아시아 동부에는 ‘티아냐의 아폴로니우스’(Apollonius of Tyana)가, 사마리아에선 마술사 ‘시몬’(Simon Magus)이 사람들을 현혹하며 스스로 메시아와 예언자라 주장했다. 기원전 70년에 갈릴리에서 나타났던 ‘하니나 벤 도사’(Hanina ben Dosa)도 병자를 치유하는 능력을 드러내며 민중을 선동했다고 한다. 또한 드다(D-da)라는 사람은 예언자로 자칭하며 많은 군중을 그러모으기도 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명령만 내리면 요르단 강도 가를 수 있다고 주장 했다.

무너진 농업 경제, 과도한 세금, 극심한 빈부격차, 자칭 예언자들의 선동, 로마의 박해, 유대인 지도층의 무관심…. 민중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1세기 유대인 사회가 술렁이고 있었다. 이러한 술렁임 속에서 나자렛 예수의 부활 소식은 유대인 사회에 전해진다. 그것은 또 다른 술렁임이었다. 그림은 사마리아에서 마술을 부리며 자기가 큰 인물이라 자청하던 시몬이 베드로 사도로부터 성령을 전달하는 능력을 사려는 모습.
특히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는 ‘예수 벤 아나니아스’(Jesus ben Ananias)를 들 수 있다. 나자렛 예수보다 약 30년 후에 태어난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유대인들의 자각을 촉구했다. 그 때문에 당국으로부터 고소당하고 재판까지 받았다. 하지만 나자렛 예수와 달리 ‘정신병자’라는 판결만 받고 방면됐다. 유대 지도층은 추종자가 적은 이 사람을 위험스런 인물로 간주하지 않았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거짓 메시아와 거짓 예언자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라고 경고한(마태 24,4-5 참조) 이유도 이러한 1세기 당시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무너진 경제, 과도한 세금, 극심한 빈부격차, 자칭 예언자들의 난립과 선동, 로마의 박해, 지도층의 무관심….

세상이 술렁이고 있었다.

“그래 맞아!” 농부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최근 소문을 기억해 냈다. 십자가 사형 당한 나자렛 예수가 살아났다는 소문이었다.

그것은 또 다른 술렁임이었다.

오늘 예수의 제자들이 마을에 들러 그 이야기를 전해 준다고 했다. 농부는 뛰기 시작했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