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유대인 이야기] (64·끝) 글을 마치며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6-09 수정일 2010-06-09 발행일 2010-06-13 제 2701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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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역사’ 따라 걸어온 긴 여정
성조 아브라함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경 속에 명맥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약속’에 대한 확고한 신념·투신
“먼 길을 걸어왔다….”

이제 여장을 풀어 내린다. 등을 누르던 무거운 짐 하나를 풀어놓는 기분이다.

그런데 짐을 벗으면 편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글의 압박감에서 해방됐는데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오히려 허전하다. 발바닥에 적당한 무게의 압박감이 없다. 허공을 걷는 느낌이다. 언제든지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한 벗을 잃은 느낌이다.

벗은 지난 1년 6개월 동안 많은 말을 해줬다. 특히 가장 인상적인 대화를 꼽으라면 아브라함을 잊을 수 없다. 신비스러운 것은, 어떻게 아브라함이 ‘인간과 대화하는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가질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다신교가 대세였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야 유일신 신앙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아브라함 시대에 인격적 유일신 신앙에 대한 영감을 떠올렸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영적 진보였다.

아브라함은 인간과 대화하는 유일신을 믿었고, 그 신앙의 꼭짓점에 스스로 섰다. 그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바로 유대인과 아랍인들이다. 이사악의 맏아들 에사우는 아랍인들의 조상이고, 둘째 아들 야곱은 유대인들의 조상이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또 ‘할례받은 유대인’ 예수로 이어진다. 유일신은 그렇게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통해 인류에게 신앙을 선물했다. 인류가 그동안 보지 못한 것을 아브라함을 통해 가르쳐준 것이다.

유대인이 인류 문화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인류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안식일 개념도 유대인을 통해서 왔다. 안식일 개념은 당시 고대 사회에선 꿈도 꾸지 못하던 것이었다. 동물이 쉬는 날을 별도로 정해서 하루 종일 쉰다는 것을 들은 일이 있는가. 나무와 꽃이 쉬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소와 양은 쉬는 날이 별도로 없다. 자연 상태에서 생물은 별도로 쉬는 날을 정해서 쉬지 않는다. 인류도 그랬다. 그만큼 휴식의 날을 별도로 정해 하루 종일 쉰다는 것은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안식일이 있었기에 인간은 생존을 위한 노동에서 벗어나 사색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지적 진보가 가속화됐다고 본다.

유일신 신앙과 할례, 안식일, 까다로운 음식규정…. 유대인들은 출발부터 타 민족과 달랐다. 뭔가 독특했다. 그 독특함이 엄청난 고난과 박해를 겪으면서도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이다.

그 ‘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을 미워하는 사람은 있어도 우습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유는 두 가지다. 확고한 신념과 그 신념에 대한 투신이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가치와 신앙을 꽉 붙잡고 일관되게 앞을 보며 전진하고 있다.

그 힘을 묘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많다. 유대인들의 삶 속에서 예언자들의 선포는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아모스, 에제키엘 등 쟁쟁한 예언자들의 삶과 신앙을 다루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예언자들을 소개한 책들은 많이 있지만,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편안한 안내서가 거의 없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유대인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로 남고 싶었다. 예언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글이 어렵고 딱딱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예언자와 관련한 내용은 빼기로 했다. 나흐마니데스 등 위대한 유대인 랍비와 유대인 역사가들의 이야기도 제외시켰다. 역시 편안한 읽을거리를 위한 선택이었다. 예언자들과 랍비, 역사가들에 대한 학술적 내용은 나중에 별도로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실 한국인들에게 유대인은 특별한 친밀감으로 다가온다. 한민족의 맨 앞줄에 단군왕검이 있다면, 유대 민족의 맨 앞줄에는 아브라함이 있다. 아브라함이 활동했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이다. 2010년이 단기 4343년 이니까 유대민족과 한민족의 역사는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셈이다. 출발한 시기도 비슷하지만, 살아온 모습도 닮은꼴이다.

두 민족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른자위 땅에 살았던 탓에 외세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받았고, 때로는 오랜기간 이민족의 지배도 받아야 했다. 자녀에 대한 남다른 교육열,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열정 또한 닮은꼴이다. 또 고난의 역사 탓인지 ‘우리끼리’ 똘똘 뭉치는 남다른 민족의식도 빼놓을 수 없다. 다른 민족에게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풍부한 영성적 성향도 비슷하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장독위에 정화수 떠 놓고 두 손 비비며 천지신명께 빌었다. 유대 어머니들도 유일신의 약속을 믿고 늘 기도했다. 한국인과 유대인은 이렇게 영적 능력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온다. 또한 한민족은 일반적으로 한(恨)의 민족이라고 불린다. 그만큼 눈물을 많이 흘렸다. 유대인들도 한과 눈물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유대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알고 있다고 해도, 탈무드, 밥상머리 교육 등 파편적 지식이 대부분이다. 유대인 이야기를 쓴 이유다.

구약성경을 다시 펴 본다. 유대인들이 부럽다. 구절구절이 모두 유대인에 대한 유일신의 짝사랑이다. 때론 속상해하고, 마음 아파하고, 그래서 화도 내지만 하느님은 그 깊은 섭리 안에서 유대인들을 끊임없이 사랑하신다.

“온 이스라엘 집안을 가엾이 여기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정을 쏟겠다.”(에제 39,25)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15)

하느님께서 짝사랑한 그 유대인들과 함께한 지난 시간은 행복했다. 유대인 이야기를 쓰면서 유대인을 사랑한 그 하느님이 역시 필자 옆에서도 늘 함께해 주셨음을 체험했다. 감사드린다.

요즘 들어 세상을 보는 눈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

예수회 앤소니 드 멜로 신부는 “아무도 감사하게 살아가면서 동시에 불행할 수는 없다”고 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새로운 태양을 볼 수 있는 것,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다는 것, 주일에 편안한 마음으로 성당을 찾아 미사에 참례할 수 있는 것, 고통이 하느님을 향한 정화의 방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세상에는 감사할 일 투성이다.

먼 길을 걸어왔다.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된 유대인 역사는 고난과 박해의 역사였지만, 유대인들은 약속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그 신념에 대한 투신으로 지금도 일관되게 앞으로 바라보며 전진하고 있다.

■ 그동안 「유대인 이야기」를 사랑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많은 독자 분들이 메일과 편지, 전화를 통해 격려해 주셨습니다. 특히 늘 관심으로 함께해 주신 이스라엘 관광청 서울사무소 박미섭 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격려로 힘을 북돋아 주신 작가 최인호(베드로)님의 은혜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살아 숨 쉬는 하느님의 섭리 역사를 찾아가는 「이야기 교회사」가 이어집니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