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유대인 이야기] (59) 학살 Ⅰ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5-06 수정일 2010-05-06 발행일 2010-05-09 제 2696호 19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유대인 가슴의 ‘다윗 별’은 주홍글씨였다
독일 점령지 유대인들에 혹독한 차별·박해
민간인 희생자만 4000만 명 … 최악의 재앙
1941년 7월 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수감자가 탈출했다. 수용소에 비상이 걸렸다. 수감자들도 공포에 떨었다. 수용소 규칙에 따르면 한 사람이 탈출하면 다른 죄수 10명이 끔찍한 지하 감방에서 굶어 죽어야 했다. 아사 형벌이다.

수용소장은 모든 죄수들을 불러 세워 놓고 아사 감방으로 갈 희생자 10명을 무작위로 골라냈다. 수용소장의 손가락이 향하는 사람이 바로 죽는 사람이었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다리에 힘이 풀려 땅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들은 울며, 동료들과 마지막 작별을 나눴다. 그런데 그 10명 안에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갑자기 울부짖으며 말했다.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에게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습니다. 죽기 싫어요!”

독일 병사가 절규하는 그를 억지로 끌고 가려던 순간이었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수인번호 16670,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St. Massimiliano Maria Kolbe, 1894~1941)였다.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10명이 아사 감옥에 갇혔다. 사람들이 굶주림 속에서 하나 둘 죽어갔다. 하지만 콜베 신부는 2주 이상 물과 음식 없이 생존했다. 그러자 기다림에 지친 독일군은 콜베 신부를 포함한 나머지 생존자 4명에게 독약을 주사했다.

콜베 신부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움직이지 않았다. 1941년 8월 14일, 콜베 신부 나이 47세였다. 콜베 신부의 시신은 이튿날인 8월 15일, 수용소내 한 화장장에서 소각됐다. 평생 동안 깊은 성모 신심 안에서 머물렀던 콜베 신부의 몸은 그렇게 성모승천대축일에 한줌의 재가 됐다.

안네 프랑크(Annelies Marie Frank, 1929~1945)는 1942년 6월 12일, 자신의 13살 생일날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안네는 그 일기장에 이렇게 적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춤을 추고, 휘파람을 불고, 세상을 보고, 청춘을 맛보고,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요.”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을 소녀는 하지 못했다. 꿈 많은 소녀, 안네는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그렇게 2년을 숨어서 지냈다. 살기 위해서였다.

192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은행가인 아버지 오토 프랑크와 어머니 메디트 사이에 태어난 안네는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이 만연하자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피신했다. 안네는 아버지가 마련한 네덜란드의 프린센흐라흐트 263번지 건물 창고에서 언니와 어머니를 비롯해 모두 8명과 함께 숨죽이며 살았다. 하지만 1944년 8월 4일 결국 나치 비밀경찰에 의해 은신처가 발각된다. 안네는 함께 붙잡힌 사람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하나 둘 가스실에서 죽어갔다.

안네의 언니를 욕보이려던 독일 경비병에게 대들던 어머니도 사라졌다. 1945년 3월경, 아우슈비츠에서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된 안네와 그의 언니는 열악한 수용소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장티푸스로 스러졌다.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죽었다. 1~2개월만 버텼으면, 해방을 맞을 수 있었지만, 소녀의 가녀린 몸은 너무 지쳐 있었다.

안네가 살아있다면 지금 82세 노인이 됐을 것이다. 꽃잎이 피기도 전에 지고 말았다.

전사자 2500만여 명, 민간인 희생자 4000만여 명.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그 참혹했던 전쟁이 성모신심 충만했던 한 사제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한 소녀의 꿈도 앗아갔다.

첫 방아쇠는 독일이 당겼다.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0분이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1300만의 독일군이 2400여 대의 전차로 구성된 6개 기갑 사단, 1180대의 전투기, 600여 대의 폭격기의 지원을 받으며 폴란드 국경으로 밀려들었다.

폴란드는 이에 50만 명의 병력으로 맞섰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게다가 적은 수의 병력을 전술상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선, 주요 요충지를 집중 방어했어야 하는데, 넓은 국경선에 퍼져 엷게 방어하는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 폴란드는 또 독일 전차에 기병 여단으로 대응했다. 기병 여단이 몇몇 전투에서 일정부분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건초에 의지하는 말(馬)은 기름으로 움직이는 전차에 장기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전쟁 개시 이후, 독일은 한 달도 채 안돼 폴란드 전역을 장악했다. 이후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인구의 20%가 살해당하는 참극을 맞게 된다.

유대인들의 가슴에 달린 다윗의 별은 ‘주홍글씨’였다. 다윗 별 그 자체는 영광과 명예의 상징이었지만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의 가슴에 강제한 다윗의 별은 비난과 멸시의 상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문제는 당시 폴란드에 살고 있던 300만여 명의 유대인들이었다. 독일과 독일이 점령한 지역의 유대인들의 삶은 비참했다. 저녁 8시 이후 외출이 금지됐다. 대중교통도 이용할 수 없었다. 걸어 다녀야 했다. 모든 가정집의 전화기가 압수됐으며, 공중전화박스에는 ‘유대인 사용금지’라는 경고 문구가 붙었다.

유대인은 식량 배급에서도 제외됐다. 가지고 있던 것을 서로 나눠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배고픈 것은 그나마 쓰린 배를 움켜 쥐며 버틸 수 있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차별’이었다.

6세 이상 모든 유대인들은 가슴에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유대인’(Jude)이라는 글씨가 적힌 다윗의 별을 착용해야 했다.

미국작가 너대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에서, 여 주인공 헤스터 프린은 간통을 의미하는 ‘A’(adultery)자를 가슴에 달고 일생을 살라는 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뒤에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달린 이 주홍글씨 ‘A’를 천사(Angel) 혹은 유능한, 훌륭한(Able)의 의미로 받아들인다.

유대인들의 가슴에 달린 다윗의 별은 ‘주홍글씨’였다. 다윗 별 그 자체는 영광과 명예의 상징이었지만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의 가슴에 강제한 다윗의 별은 비난과 멸시의 상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윗 별은 특히 유대인들을 고립시키는 작용을 했다. 안네 프랑크는 은신처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우리들을 가엾게 보았지만, 노란별을 단 우리를 그들은 도와주고 싶어도 돕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절규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유대인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