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김수환 추기경 7고 묵상] (5) 제5고(苦)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우현 기자
입력일 2010-03-10 수정일 2010-03-10 발행일 2010-03-14 제 2688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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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고 진실·정의 따라 행동
유신정권 아래 사회 갈등 고조
김 추기경 혼란 중심에서 고뇌
타협않고 소외된 이웃 곁 지켜
1970년대 유신정권 시기, 한국사회는 검은 막을 드리운 것처럼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날이 갈수록 정치·경제적 모순과 부조리가 계속 또 다른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혼란이 지속되자 시국을 걱정하는 통탄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실을 밝히려는 움직임은 점점 거세졌다. 교회가 앞장서주길 바라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가톨릭교회와 명동성당은 유신정권과 맞서 싸우는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비춰졌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 모든 혼란의 중심에 서있었다. 일련의 사건들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정부 압력은 물론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비판까지도 홀로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교회 내 목소리마저도 반목을 거듭하고 서로 상처를 냈다. 모든 비판을 감싸 안기에는 인간적인 고뇌가 앞섰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그는 하느님 앞에서 이 질문을 붙잡고 버텼다. 수도 없이 되뇌었다. 자신을 온전히 알고 계신 하느님 앞에서 드리는 기도만이 그의 버팀목이 돼줬다. 그 버팀목은 서슬 퍼런 공포정치 속에서도 불의에 맞설 수 있게 했다. 그저 하느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보인 그 모범을 따라갔다.

깊은 갈등의 골이 지속되던 그때, 급기야 교회와 정부 권력이 정면충돌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1974년 4월, 이른바 민청련 사건에 전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연루됐다. 그들이 밝힌 혐의는 불순 세력의 조종을 받는 불법단체에 자금을 댔다는 것. 유신정권은 지 주교에게 용공분자라는 올가미를 씌울 참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 대통령과 직접 대면했다. 사회 혼란 속에서 종교가 가진 역할을 온건하고도 담담하게 풀어냈다. 그리고 지 주교의 석방을 요청했다. 김 추기경의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아울러 사형을 언도 받았던 민청련 연루자들의 목숨까지도 살려냈다. 양심의 소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던 지학순 주교가 1974년 7월 23일 김 추기경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심 선언’을 하고 있다. 김 추기경 왼쪽이 윤공희 대주교.

풀려난 지 주교는 감시를 받는 병원생활에도 불구하고 양심선언을 통해 다시금 시대의 소리를 냈다. 당시 교회는 사회 정의를 밝히려는 정의구현사제단과 종교의 정치 참여를 걱정하는 구국사제단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냈다. 김수환 추기경이 그렇게도 우려했던 교회의 분열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이 없었다. 공정했다. 그는 사람들의 주장에 이리저리 휘둘리기 보다 오직 진실과 정의만 바라봤다.

1978년 명동성당에서 단식 농성 중인 동일방직 여공들을 위로하는 김 추기경. 김 추기경은 소외된 이웃의 ‘존엄성’을 모든 행동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런 그가 편을 들어준 것은 격동기에 내던져진 가난한 이들, 고통 받는 이들같은 소외된 이웃이었다. 모든 것이 인간 중심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만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이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라 믿었다. 1987년 6·10 항쟁 당시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의 위기도 그런 믿음으로 막아냈다.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이 있을 것이오.”

이때부터였다. 서울대교구장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내려놓은 뒤까지도 오랜 불치병인 ‘불면증’이 그를 괴롭혔다. 밤마다 잠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다. 교회는 물론 사회의 지도자로서 느끼는 압박감은 대단했다.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나라의 미래마저 가슴 속에 커다란 돌덩이를 얹어 놓은 듯했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또 포기하지도 않았다.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던 그는, 역사 앞에 양심을 지켜냈고, 타협하지 않았다.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도 당당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냈다. 지나침도 없었다.

또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사목표어처럼 역사의 혼란 속에 상처 입은 이들의 곁을 지켰다. 또한 고통 속에서도 모두를 감싸 안는 포용력과 용서, 사랑을 가르쳐줬다.

1979년 박 대통령의 죽음으로 유신정권도 막을 내리는 듯했다. 박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김 추기경은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다. 그의 기도는 주님 앞에 내맡겨진 한 인간을 위한 기도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 모습. 김 추기경(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은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다.

이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