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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7고 묵상] (4) 제4고(苦) “고통의 바다를 향해…”

임양미 기자
입력일 2010-03-02 수정일 2010-03-02 발행일 2010-03-07 제 2687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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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1966년 5월 31일 마산교구장직 착좌 당시 김 추기경의 모습.
1966년, 사제서품 15년 만에 주교품에 올라 마산교구장직의 소임을 받게 된 김수환 추기경은 ‘순명의 길’에 대해 생각했다.

‘아브라함도 모든 것을 버리고 야훼의 목소리를 따라 길을 걷지 않았던가!’

그는 성모님처럼,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뒤따르는 성직자의 길을 걷고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인 5월 31일 주교좌에 착좌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삶, 모든 이에게 밥이 되는 삶을 살자는 생각에 사목표어를 정했다.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Pro Vobiset Pro Multis)’

훗날 추기경 자리에 올랐을 때도 그는 이 사목표어를 조금 고쳐 썼을 뿐이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그는 모든 이를 위하여 살았다. 신자 비신자 가리지 않았고, 불교 개신교를 가리지 않았으며,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았다. 모두를 공평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눈을 닮으려 애썼다.

때문에 그는 약자의 눈물로 홍수를 고해(苦海)를 향해, 교회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 빗장문을 열기까지, 수많은 고민이 뒤따랐다.

‘교회는 이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의 뜻을 마음에 새기며 수많은 시간 묵상했다. 교회는 세상 속에 하느님 구원의 역사를 써야 하지만, 또 동시에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모든 생각과 판단의 기준이 됐던 것은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것 앞에 ‘사람’을 세웠다. 사람만이 1970년대와 1980년대란 혼돈의 시기를 항해하는 김수환 추기경의 등대였다.

1968년, 그는 한국교회 사상 최초로 시국담화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경제 성장을 위한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정책이 급물살처럼 밀려오던 당시, 열악한 환경 속에서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눈물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대의 약자였고, 의지할 곳 없는 길 잃은 양이었다.

사건의 불씨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가 댕겼다.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신앙인으로서 주어진 본분에 최선을 다하며 노동 영성의 씨앗을 뿌리던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들은, 1967년 강화도 심도직물에 합법적인 노동조합을 주도적으로 결성했다. 신앙인이자 노동자였던 이들은 전원 해고됐다. 폭력배들의 협박과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이 문제는 비단 강화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대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였다. 사람 앞에 돈을 세우는 자본주의 횡포가 시작된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결단을 내렸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 앞에 내세울 수 없다. 돈이 사랑과 자애의 그리스도 정신보다 중요하게 여겨질 수는 없다.’

그는 임시 주교회의를 열 것을 건의했다. 강화도 심도직물 사태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교회의 입을 열어야겠다는 결단에서다. 1968년 2월 9일, 마침내 교회가 세상이라는 고통의 바다를 향한 빗장을 열었다. 주교 열네 명이 서명한 시국선언서가 발표된 것이다.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라는 이름의 발표문으로 교회는 세상에 첫 발을 내딛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회 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노동력 착취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범하기 쉬운 자본의 횡포이다. 따라서 주교단은 강화본당 신부와 노동자들의 정당한 활동을 지지한다. 인간 기본권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수호되어야 하기에 주교들은 부당한 노사관계를 개선하는 데 적극 노력할 것이다.”

성명서의 울림은 컸다. 6일후 해고자 전원이 복직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곳곳에 노동자의 절규가 끊이지 않았다.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하는 등 수많은 생명의 고통은 날로 더해갔다. 그럴수록 김수환 추기경은 어깨의 십자가가 무거워져옴을 느꼈다. 양떼의 울음소리에 잠 못 이루는 착한목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1968년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들과 찍은 기념사진. 강화도 심도직물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던 이들은 김 추기경이 건의하여 열린 임시 주교회의에서 발표한 시국 선언서를 통해 전원 복직됐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한 김 추기경의 모습. 김 추기경은 경제 성장을 위해 착취당하고 희생 당하는 노동자의 편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임양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