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제의 해 기획-사제의 사제 Ⅱ] 2. 방유룡 신부 (하) 영성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3-02 수정일 2010-03-02 발행일 2010-03-07 제 2687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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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온전히 당신께 봉헌합니다”
방 신부는 그리스도교 사상 및 철학을 단순히 수용한 것이 아니라 한국화하여, 동양적 그리스도교 영성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진석 추기경은 지난 2003년 발간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50년사」에서 수도회 설립 50주년을 축하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나온 역사의 교훈과 계승된 공동체의 영적 자산을 통해, 각 회원들이 ‘면형무아’의 삶을 가꾸시길 바랍니다.”

이처럼 방유룡 신부 영성은 ‘면형무아’로 요약된다. 방 신부는 자신의 호도 ‘무아’(無我)라고 지었다. 방 신부에게 있어서 면형무아는 순교정신의 최종목적지이자, 수덕생활의 최종 목적지다. 그리고 이 면형무아를 위한 방편이 점성(點性), 침묵(沈默), 대월(對越) 등이다.

▨ 면형무아(麵形無我)

면형무아 영성은 성체신비에 닿아 있다. 즉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시의 모든 것을 비우시고 밀떡의 형상 안에 당신을 담아 우리에게 온전히 내어주신 신비가 바로 면형무아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완전히 없앰으로써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뤄야 한다. 그리고 이웃을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주어야 한다.

즉 면형무아의 삶은 나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르는 삶이다.

면형무아의 삶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한 이들이 순교자들이다. 방 신부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창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방 신부는 자신의 삶과 영성을 통해, 순교자들이 죽음으로써 자기를 버리고 신앙을 증거한 것처럼 우리들에게 비움의 삶을 살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방 신부는 이 ‘면형무아’에 도달하기 위해 침묵(沈默)의 길, 사랑의 대월(對越), 점성정신(點性精神)을 강조했다.

▨ 점성(點性)

점성은 일상 안에서 순간 순간 성화한다는 의미다. 방 신부는 만물의 기초가 되는 점의 성질처럼 영성생활도 점처럼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서 출발한다. 방 신부는 그래서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당부했다.

방 신부는 또 작은 일, 작은 순간을 성화하기 위해서는 ‘정성스러움’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느님 앞에 정성스러운 태도로 부복하고, 사람들을 정성스럽게 만나는 것, 일을 정성스럽게 처리하고 모든 행동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점성정신은 또한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 대한 가치를 알아보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정성으로 자기 본분에서 요구된 범상하고 미소한 일까지도 알뜰하고 빈틈없이 하는 삶이다. 또한 덕은 일의 종류나 크고 작음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수행하는 마음가짐, 곧 정신에 따라 덕이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러한 점성정신은 비천한 곳까지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으로 그분이 걸어가신 무시, 모욕, 천대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희생적인 삶으로 봉헌하는 삶이기도 하다. 이 점성정신이 있을 때 침묵을 하게 된다.

▨침묵(沈默)

방 신부에 따르면 침묵은 빛이다. 방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빛은 양심을 비추는 것인데 영혼의 눈도 있고 육신의 눈도 있다. 부활 초는 큰 빛이요, 우리는 작은 초를 가지고 불을 붙인다.”

침묵생활은 말 안하는 무언(無言)의 상태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기쁘게 해 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삶이다. 침묵은 우리 자신과 정신을 극기로써 밝히며 절제하는 것으로, 방 신부는 분심, 사욕, 귀, 눈, 말, 맛, 코, 수족, 이성, 의지를 다스리는 침묵십계(沈默十戒)를 제시했다.

침묵은 크게 내적 침묵과 외적 침묵 그리고 영혼침묵(이성침묵, 의지침묵)으로 나눠진다. 그리고 완덕오계로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진다.

완덕오계에서 1계와 2계는 내적 침묵에 해당된다. 1계는 분심잡념을 물리치는 절제된 삶으로 세상사 안에서 하느님 뵙기를 노력하는 것이며 동시에 호기심을 억제하는 것이다. 많이 보아선 안 된다. 많이 들어서도, 많이 말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지향을 갖고 상상이나 추측 그리고 오관을 절제해야 한다. 2계는 사욕을 억제하는 것으로 맑은 양심을 기르는 것이다. 나만 편한 이기주의와 교만한 마음과 고집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침묵이다.

외적 침묵에 해당되는 3계는 외적으로 늘 평화의 미소를 띠고 말과 행동에 불만 감정을 발하지 않는 침묵이다. 이 침묵을 지키는 이는 태도에 있어서 단정하고, 흐트러짐이 없으며, 행동이 과장되지 않고 자연스럽다.

앞으로 1, 2, 3계를 잘 수행하면 4계가 밝아질 수밖에 없다. 이 단계가 바로 뒤에서 설명할 대월생활이다. 영혼침묵 중에서 이성침묵에 해당되는 4계는 양심 불을 밝히는 데 있으며, 양심 불을 밝히려면 선행이 필수적이다. 선행이 중단되면 양심 불이 꺼진다. 우리는 선으로써 양심 불을 켜고 덕으로써 양심 불의 촉수를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의지침묵에 해당되는 5계는 “내가 가진 모든 자유를 천주께 바치고 그 성의를 따를지니라”는 삶의 계율이다. 우리의 가장 귀한 자유를 하느님께 바치면 더 완전한 자유를 받는다. 이 단계는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희생 제사를 봉헌하는 것으로 자유의지를 다스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 5계가 바로 면형무아의 경지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어떠한 수고함 없이 애덕의 삶을 살 수 있다. 이 애덕의 삶은 양심에 어긋남이 없는 자유의지로 선택한 진(眞)?선(善)?미(美)?호(好)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다.

▨ 대월(對越)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기 위해 침묵을 강조한 방 신부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그분과 마주본다는 의미를 지닌 ‘대월’을 통해 정화된 영혼이 하느님과 인격적인 친교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대월생활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대면하게, 자신을 정화시키는 행위다. 이 삶은 3칙과 2효과로 구성되어 있다.

“1칙은 내 자작으로 아무것도 아니한다. 2칙은 나는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한다. 3칙은 나는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바를 항상 해드린다.”

그 효과로 두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는 항상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두 번째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친히 하신다.”

결국 대월의 3칙과 2효과는 어떠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모든 세상만물에 제한받지 않는 관상적인 삶으로의 초대를 뜻한다.

이 초대는 하느님을 영적으로 맛들이게 하고 하느님 계획 안에 머물게 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방 신부와 동생 수녀.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