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한국평협 고문 이관진 회장

정리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0-02-24 수정일 2010-02-24 발행일 2010-02-28 제 2686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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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으로 다가온 고맙기 그지없는 은사”
삶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차 있을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한국 평신도사도직협의회 고문 이관진(베드로·83) 회장의 삶이 꼭 그러하다. 이 회장은 그런 자신의 삶의 뿌리를 주님께 대한 확신에서 찾는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총입니다.”

이 회장에게 이런 마음을 품게 만든, 그래서 은총과도 같이 다가온 존재가 고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자신의 삶 전체를 주님의 지혜에 따라 이루어진 기적이라고 고백하는 그에게 김 추기경은 시시때때로 기적을 열어 보여준 시대의 예언자였고 고맙기 그지없는 은사였다.

완덕을 향해 나아간 성자

“평생 과분한 사랑 받았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십시오.”

지금도 마지막 순간까지 이 말을 전하던 고인이 내 앞에 있는 것처럼 눈에 선하다. 웃음 지을 때마다 만면을 환하게 물들이는 것 같던 그 선한 눈빛, 입을 열 때마다 가슴을 한바탕 휘저어놓던 말마디가 너무도 생생하기만 하다. 간절히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며 몸짓이 이런 울림을 전해줄 수 있을까.

그가 우리들 가슴에 전해준 울림이 오래도록 공명을 일으키며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듯해 고인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쏴한 느낌이 몰려든다. 그가 남긴, 전해주고자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무엇이기에 지금도 나 같은 이에게 이런 느낌과 생각으로 살아있는 것인가. 아니, 그저 살아있다기보다는 살아서 격렬히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한 세대가 훨씬 넘도록 늘 놀라운 깨달음을 주는 스승으로, 존경스럽기 그지없는 목자로, 사랑 넘치는 어버이로 가까이서 뵈어온 김 추기경을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완덕’에로 나아간 성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했기에 가없는 사랑으로 당신이 늘 말씀하시던 ‘바보’가 될 수 있었고, 가난한 이들과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울보’가 될 수 있었고, 누굴 위해서라면 기꺼이 팔을 걷어붙일 수 있는 ‘이웃’이 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깨어 있으라”는 울림을 전해준 이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합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김 추기경이 취임사에서 밝힌 말씀은 지금도 내 뇌리에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당시 일선 기자로 내무부를 출입하고 있던 내게 추기경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음성은 신선함을 넘어 충격으로까지 다가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추기경은 일찌감치 언론의 위상을 알고 그 중요성을 꿰뚫어보신 분이었던 것 같다. 교구장으로 오시기 전 1964년부터 1966년까지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을 지내며 기자로, 영업사원으로 1인3역을 해내신 경험이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추기경은 언론인들을 만나실 때면 언론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1968년부터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재로도 활동하신 추기경은 교회의 어른으로서 누구보다 바쁜 와중에서도 가톨릭언론인들이 청하는 모임이나 행사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으실 정도로 언론인들에게 큰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셨다.

사회적 대우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던 기자들에게 추기경은 물심양면으로 적잖은 도움을 주셨다. 올곧은 길을 걸어가는 언론인이라는 판단이 서면 당신의 위치도 개의치 않고 의견을 구하기도 하시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어려움에 처한 언론인이 있으면 아무도 몰래 도움을 주기도 하셨다.

그러한 김 추기경을 그저 ‘좋은 분’ ‘착한 목자’로 기억하는 것 또한 그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주님의 예언자로서 그의 참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내가 편집국장까지 지내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던 때 일어났다. 1971년 성탄 전야, 추기경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을 터뜨렸다. 예수성탄대축일 전야에는 으레 명동성당에서 봉헌되는 자정미사가 공중파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곤 했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고질적 부패와 사회 불안의 연원이 현재의 부조리한 권력과 금력의 정치 체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진실로 과감한 혁신이 없으면 부정부패 일소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강론 시간에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울려 퍼진 추기경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어디서 그런 생각과 용기가 나왔을까. 그분이 전해준 울림으로 인해 소름 돋치는 듯한 감동과 부끄러움으로 몸을 떨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때의 경험은 마치 죽음을 앞두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깨어 있어라”며 우리의 뇌리를 흔들어대는 것 같았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는 말씀 따라

먼발치에서 뵈오던 추기경을 가까이서 모시게 된 것은 기자생활을 접고 한국샤프를 세운 뒤 1979년 신자기업인들의 모임인 한국가톨릭실업인회가 태동하면서부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교회를 위해 조그만 힘이라도 보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창립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추기경도 실업인회 창립에 힘을 실어주시며 이러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실업인회가 활동에 들어간 이후로는 교회 안에 일이 생길 때마다 우리를 부르셔서 터놓고 의견을 구하셨다. 82년에는 서울대교구 가톨릭실업인회가 만들어졌는데 어쩌다 보니 부회장직까지 맡게 됐다. 그러다 84년부터는 도망 다니다시피 하며 몇 차례나 고사했지만 추기경의 간곡한 권유로 결국 한국가톨릭실업인회 회장이라는 무거운 십자가까지 지게 됐다. 내리 네 번을 연임하며 몸에 안 맞는 듯한 무거운 옷을 입고서도 큰 탈 없이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추기경의 관심과 배려 덕분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난감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평신도들의 대표인 한국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이 일만큼은 도저히 내 몫이 아니라는 생각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기까지 했다.

“하느님께서 부르고 계신 겁니다. 모든 걸 주님께 맡겨 드리세요. 당신께서 다 알아서 쓰십니다.” 이번에도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든 분은 추기경이었다. 당신 집무실까지 부르셔서 말씀하시는 데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추기경은 능력에 넘치는 직분을 맡아 늘 고심에 차있던 나를 시시때때로 부르셔서 힘을 불어넣어주셨다. 우리 둘 다 일찌감치 술 담배를 끊은 터라 만나서 무슨 재미가 있을까 하겠지만, 그분과 함께하다 보면 교회도 세상도 달리 보이는 새로운 개안(開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추기경을 만날 때마다 그분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갔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분과 함께하는 일도 잦아졌다. 교회 차원에서 새롭게 불붙기 시작한 우리농촌살리기운동부터 도덕성 회복을 위해 펼친 「내탓이오」 운동, 우리농산물먹기운동, 우리상품쓰기운동 등 교회의 역할이 필요한 다양한 현장마다 추기경은 함께해 주셨다. 나를 비롯한 신자들은 이런 그분의 모습이 큰 격려가 돼 교회 일이라면 혼신의 힘을 쏟겠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이렇듯 함께하다 보니 발견하게 된 그분의 모습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이 지닌 잠재력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워주는 능력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능력 또한 주님이 맡겨주신 양들을 돌보고자 하는 목자의 마음에서 발로한 것이 아닐까 싶다.

넘치는 사랑

누군가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는 느낌은 어떠할까. 또 그런 사랑을 받은 이는 어떻게 변화될까. 먼저 나 자신이 추기경으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았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어느 날 주교회의에서 연락이 왔다. 교황이 평신도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인 ‘성 대 그레고리오교황 기사단장’ 훈장을 내가 받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멍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바티칸으로 초대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하고 함께한 몇몇 주교들과 미사를 드릴 때는 마치 천국에 와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물론 훈장을 상신한 분은 추기경이었다. 추기경은 내 일을 당신의 일처럼 기뻐하셨다. 교황대사관에서 열린 모임을 비롯해 이러저런 모임마다 나를 부르셔서 축하해주고 누구보다 자랑스러워 하셨다.

추기경은 가끔씩 비서도 대동하지 않고 우리집을 방문하셨다.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눌 때면 오래전부터 한식구인 듯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별히 어린이들을 좋아하셔서 내 손자 손녀들과도 얘기를 많이 나누셨는데 어쩌면 아이들까지 그렇게 좋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셨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추기경께서 내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사랑이란 늘 넘치는 것이 아닐까. 넘쳐서 더 많은 존재를 채우고 또 사랑으로 물들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제 그 사랑의 화신이 우리 곁에 없다. 여전히 사랑을 필요로 하는 시대이기에 그분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추기경은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대로 사셨다. 끊임없는 성찰과 반성을 통해 남은 삶의 한자락까지 그분을 닮아갔으면 좋겠다.

1993년 11월 15일 열린 평협 창립 25주년 기념만찬에서 김 추기경이 이관진 회장과 함께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왼쪽은 당시 주한 교황대사 조반니 블라이티스 대주교.
서울대교구장 재임시절 김수환 추기경의 영명축일을 맞아 서울 평협이 마련한 축하연 자리. 김 추기경은 늘 이관진 회장을 가까이 했다. 김 추기경 오른쪽이 이관진 회장.

정리 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