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교회 창립 선조를 찾아서] (14) 권일신 (2)

입력일 2010-02-23 수정일 2010-02-23 발행일 2010-02-28 제 2686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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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조선교회 지도자로 활약
천주교회의 성직자 제도를 자세히 모르면서 천주와 교회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선의로 시작한 조선천주교회의 임시 성직자들은 사목적으로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며, 거의 2년여 동안 그 직무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기유년(1789)에 교회 서적의 어떤 구절을 더 자세히 연구한 결과, 임시 성직자들에게 의혹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중지하면서 북경의 서양 선교사들에게 문의하기로 하였다. 모든 신자들 앞에서 그런 직위에서 일하다가 그만둘 때, 일반의 웃음거리가 될 염려가 있는데도, 즉시 그 직위를 버린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뜻은 올바르고 신앙은 진실하였으므로, 그들은 어떠한 구실로도 성직을 모독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즉시 평신도 자리로 돌아갔고, 그 때부터는 신입교우들을 가르치고, 외교인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일에만 전심하였다.

북경 주교에게 문의하는 편지는 이승훈 성현과 함께 신도대표 격으로 권일신 성현 자신이 썼고, 그것을 확실히 전달할 방도를 모색하다가, 연례 사신 행차의 자연스러운 기회를 이용키로 하였다. 그러나 중국 천주교회와의 연락이 비밀이어야 하므로 이 위험한 사명을 맡을 만한 유능하고 헌신적인 인물을 찾아내야만 하였다. 사신 일행에는 천주교 신자가 없으므로 외교인들 모르게 신자 한 사람을 거기에 들여보내도록 해야만 하였다. 이 중요한 사명을 위하여 예비신자 윤유일 바오로에게 눈을 돌렸다.

윤유일 바오로는 여주지방의 양반집 후손으로 권일신 성현의 제자로서 성현에게서 배웠으며, 성격이 온순하고 친절하며, 비밀을 잘 지키므로, 계획된 이 사업의 적임자였다. 윤유일은 이 사명을 받은 후 북경주교에게 권일신 성현과 이승훈 성현이 드리는 편지를 가지고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1789년 그 해 10월에 북경을 향하여 떠났으니, 이러한 일을 주도적으로 지휘하던 사람은 바로 권일신 성현이었다. 즉 이벽 성조 순교 후, 제2대 지도자로서 권일신 성현이 신생 조선천주교회를 지도하게 된 것이다.

윤유일은 마침내,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북경에 도착하여, 곧 주교를 찾아가, 자기가 가져온 편지를 전해 드리고 조선에서 일어난 모든 일과 새로 태어나는 조선천주교회의 기쁨과 고민을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해 드렸다. 권일신 성현의 심부름꾼으로서 온 윤유일은 북경 교회에 큰 기쁨을 주었다.

어떤 선교사도 들어가지 않은 나라에서 와서, 그 나라에 신앙이 얼마나 기묘하게 보급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 천주교인의 존재는 선교사들과 특히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가장 놀랍고도 즐거운 손님이었다. 주교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기시는 이 새로운 교우들에게 서둘러 사목교서를 썼다. 경술년(1790) 봄에 윤유일은 사신행차를 따라 귀국길에 오르기 전에, 북경에서 영세와 영성체와 견진성사를 받았었다. 이 천상의 도움으로 힘을 얻은 그는 모든 어려운 고비를 교묘하게 벗어날 수 있었고, 의심을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 아무런 곤란한 문제도 당하지 않고, 서울로 돌아왔다. 주교의 회답은 윤유일 바오로가 옷 속에 더 쉽게 감춰서 조선에 들여 올 수 있도록 명주 조각에 쓰여졌었다. 편지를 받을 사람은 이승훈, 권일신 두 성현들이었다.

※ 자료출처 : 천진암성지 홈페이지(chonjinam.org).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중 한 명인 권일신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