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인권운동의 대부’ 이돈명 변호사

정리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0-02-09 수정일 2010-02-09 발행일 2010-02-14 제 2685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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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청하면 둘을 내어주신 아버지 같은 분
인권운동가 서준식 씨와 이돈명 변호사(맨 오른쪽)가 함께 1988년 6월 김수환 추기경의 집무실을 방문해 환담을 나누고 있다.
이돈명 변호사는 김 추기경과 터놓지 못할 말이 없는 사이였다고 옛 일을 회상했다.
한국 인권운동의 대부이자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이돈명(토마스 모어) 변호사. 그는 고 김수환 추기경과 1922년생 동갑내기다. 고인이 살아있었더라면 올해 미수를 함께 맞았을 터다. 김 추기경은 생전 이 변호사와는 터놓지 못할 말이 없을 정도로 스스럼없는 사이였다.

이 변호사는 고인과 나이만 같은 게 아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이후 30년 넘게 주님의 뜻을 나누는 동지이자 신앙의 동반자로서 남다른 관계를 이어왔다. 서슬 퍼런 독재의 숲을 헤치고 험난한 길을 함께 걸어왔기에 고인에 대한 이 변호사의 기억은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다.

이 변호사가 기억하는 김 추기경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마름을 읽을 줄 알았기에 함께 목말라했을 뿐 아니라 물꼬를 트기 위해 기꺼이 나설 줄 아는 농부였다. 그가 이야기하는 고인은 그저 고위성직자로서 남기 바란 사제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줄 알았던 시대의 예언자였다.

# 우리 시대의 성자

김수환 추기경을 떠올릴 때면 내 머리 속에서는 그리스도인이란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불림 받은 존재라는 깨달음이 새록새록해진다. 이런 나의 깨달음은 먼저 하느님 품에 안긴 고인과 한 시대를 살면서 더욱 깊어졌다고 할 수 있다.

추기경은 나보다 석 달쯤 먼저 태어났는데 앓았던 병도 나와 비슷했다. 귀도 잘 안 들리고, 걷는 것도 불편하고…. 그러고 보면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았던 것 같다.

쉰을 넘겨 1974년 늦깎이로 주님의 자녀가 된 내가 김 추기경과 가까워지게 된 것은 오롯이 그분의 성품과 사랑 때문이었다. 변호사로 활동하던 나는 당시 원주교구장이던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일로 그해 9월 탄생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일을 돕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추기경과 인연을 쌓게 되었다. 주님의 길에 발을 들여놓은 내게 추기경은 우리 시대에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분의 사랑을 펼치는 길이 무엇인지 열어 보여준 존재였다.

가까이서 지켜본 김 추기경은 강직한데다 인권에 관심이 많아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남달리 정을 쏟는 분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여건 때문에 마음처럼 앞장서기는 힘들 때가 적지 않았지만 항상 관심을 갖고 도와주셨다. 특히 엄혹한 군사독재시절 엄두가 나지 않아 감히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을 때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을 묵묵히 감당해내곤 했다. 유신정권시절, 한 번은 추기경과 함께한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학생들을 강압적으로 대하지 말고 정국을 부드럽게 끌어가라는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추기경은 이런 의견을 받아들여 우리가 명동성당에 머무는 동안 청와대에 다녀왔다. 청와대에서 돌아온 추기경이 “대통령이 고개는 끄덕거리는데, 안 될 것 같아”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그 후로도 추기경은 고통에 찬 이들의 목소리가 비등할 때면 극비리에 대통령과 만나 민중의 뜻을 전하는 언로 역할을 마다치 않았다.

1970년대 긴급조치로 서슬 퍼렇던 당시에도 김 추기경은 두려움 없이 주님만 보고 그분의 길을 내달렸다. 민청학련 사건, 3?1구국선언, 김지하 시인 필화사건, 1986년 5?3 인천사태, 임수경 방북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우리나라의 굵직굵직한 역사적 현장에서마다 추기경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했다. 이렇듯 그는 군사정권의 독재와 인권유린에 ‘사랑’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대항한 그리스도의 투사였을 뿐 아니라 투철한 신앙인이었다.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우리 힘만으로는 헤쳐 나가기 힘든 일이 생길 때면 서울 명동 추기경집무실은 거의 우리의 아지트가 되다시피했다. 우리 둘 다 가난한 농사꾼 아버지를 둔데다 연배도 같아서인지 유달리 친하게 지냈다. 추기경은 상의할 일이 생길 때면 불러서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에 대한 의견을 청하기도 했다. 인간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이런 가운데 자연스럽게 추기경이 보여주는 삶이 참다운 사제, 착한 목자의 길이라는 생각을 품게 되기에 이르렀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김 추기경은 한마디로 따스함이 몸에 밴 분이었다. 그는 항상 약하고 가난한 이들 편에 섰다. 진심으로 모든 사람이 다 슬기롭게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졌다. 누구든 한두 번만 만나도 금방 추기경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에서 우러났음직한 김 추기경의 세심한 배려는 순간순간 많은 이들의 마음을 한데 모으고 더 큰 힘으로 드러나게 하는 촉매와 같은 역할을 했다.

환갑 때 일이다. 내가 환갑이라는 것을 알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며 명동성당 근처 조그마한 식당에서 모임을 열어주셨다. 몸소 나서서 전국 곳곳에 연락해 인권운동가들을 한자리에 모으셨다. 식당에 사람들이 꽉 들어찬 가운데 얼마나 정답고 즐거웠던지…. 추기경이 참석해 모임을 이끄시니 모두들 좋아서 함께 웃고 울고 했다.

아무도 눈길을 두지 않는 이들을 뒤에서 몰래 도우셨다는 사실은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일이다. 어린 여성노동자들이나 이주노동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행사를 하려는데 장소를 빌려주는 이가 없을 때도 추기경은 명동성당 문화관 등 교회 시설을 열어주신 것은 물론 음식까지 마련해주실 정도로 하나를 청하면 둘 이상을 내어주는 아버지같은 모습이셨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1970년대에는 데모하다 잡히면 벌금이 엄청나게 나왔다. 그때 추기경은 데모하는 사람들 피할 곳을 만들어주셨을 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게 이러저런 도움도 많이 주셨다.

그분의 따뜻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도 적지 않다. 추기경은 밀려드는 시국사건들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인권변호사들이 안쓰럽게 보이셨던지 우리를 격려하는 자리도 수시로 만드셨다. 그럴 때면 으레 명동성당 뒤편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으로 우리를 부르셨다. 수도자들이 정성껏 준비한 맛있는 음식에 술까지 대접받은 우리들은 누군가의 입에서 “추기경님, 2차 갑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그분의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1986년 5?3 인천노동자 시위 사건과 관련해 이부영 씨를 도와주었다는 혐의로 내가 구속됐을 때도 추기경은 두 번이나 면회를 오셨다. 별 것도 아닌데 뭐 하러 오셨냐고 했더니 웃으며 위로해주시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추기경은 사람들과 도타운 정을 나눌 줄 아는 세심한 면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주위에는 늘 많은 사람이 몰려든 게 아닌가 싶다.

김 추기경의 삶을 돌이켜 볼 때 그가 만나온 이들만 보더라도 그의 지향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알듯 그는 장애인, 홀몸노인, 소년소녀가장 등 가난한 이들은 물론 누구의 눈길도 받지 못하던 철거민, 윤락여성들과 사형수들에게까지 먼저 다가갔다. 내 기억에 그런 김 추기경의 방문을 받은 많은 이들이 처음에는 놀라고 두려워하기까지 했던 게 아닌가 싶다. 다만 그 두려움은 그의 큰 사랑에 대한 경외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사랑 넘치는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타 종교인들과 믿지 않는 이들까지 감화시켜 삶에 있어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주었다. 추기경의 삶은 그런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자(聖者)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한 교회의 모습을 봐올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평생 꿈꿔왔던 민주화의 현장에서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모습을 자신을 통해 보여준 김수환 추기경이란 존재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그를 따르는 길

김 추기경을 기리는 것은 개인을 ‘신화’화하는 장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행했던 아름다운 일을 기억하고 이를 이어받는 것이어야 한다.

김 추기경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단순히 개인의 것이 아니기에 특별히 따로 모아 추모할 일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살아있는 동안 그분의 입이 되고 몸이 되었던 것이니 그의 말과 행동은 그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차례다. 그가 미처 다하지 못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마저 바치는 일이야말로 남은 우리의 몫이다. 그분의 일을 기리는 것은 남은 이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정리 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