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제의 해 기획-사제의 사제 Ⅱ] 2. 방유룡 신부 (중)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1-27 수정일 2010-01-27 발행일 2010-01-31 제 2683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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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수도회 건립에 모든 것 바쳐
인천 만수동농장(현 성 안드레아 피정의 집)에서의 방유룡 신부 모습.
모두가 힘들 때였다. 방유룡 신부가 사제가 되고, 완덕을 염원하며 영성의 깊이를 심화하고, 민족 구원의 염원을 불태우던 시기는 일제치하, 한국전쟁, 이념의 대립 등으로 우리 민족이 심하게 앓던 때였다.

방 신부는 일제치하에서 사제생활을 시작한다. 1930년 10월 26일 사제 서품을 받은 방 신부는 강원도 춘천본당 보좌 신부로 첫 사목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9월 황해도 장연본당 보좌로 이동한 방 신부는 1933년 2월 제령본당 주임신부가 됐으며, 1936년 5월에는 해주본당, 1942년 2월에는 경기도 개성본당 주임으로 발령나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만약 방 신부가 해방 이후에도 개성 본당에서 계속 있었다면 아마도 오늘 우리는 방 신부의 동양적 그리스도교 영성의 지순한 깊이를 접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방 신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한 달을 앞둔 1950년 5월 서울 가회동본당 주임으로 이동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제기동 본당 주임으로 임명됐다. 또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5년부터는 후암동본당 제4대 주임신부로 활동했다.

방 신부는 이러한 일선 사목활동 기간 동안 늘 가지고 있었던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는 한국교회가 실질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민족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전통적 정서를 계승해야 한다고 믿었다. 민족의 구원을 염두에 둔 한국인 사제로서 한국인에 맞는 참된 구도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의 수도회 창설을 꿈꿨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는 여러 방해로 인해 수도회를 창설하지 못했다. 꿈은 해방 직후에 이뤄졌다. 1946년 4월 21일 예수부활대축일에 개성본당 사무실에서 윤병현(안드레아) 홍은순(라우렌시오) 두 수녀가 입회함으로써 드디어 ‘한국순교복자수녀회’가 출범한다. 1946년은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병오박해(1846년)로 순교한지 100주년이 되던 해였다. 수도회의 명칭이 ‘순교복자’인 것은 방 신부가 한국인의 수도생활은 당연히 순교자들의 얼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녀회는 이후 1951년 12월 12일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수녀회는 한국 수녀회로는 처음으로 일본에 진출(1967년) 하고, 1980년대에 들어서는 독일과 멕시코에도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지금까지 순교 영성을 바탕으로 하는 활발한 사도직 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꿈의 실현을 위한 정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창설한 것. 방 신부는 이로써 한국적 영성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구현해 내는 남녀 수도회를 세우겠다는 소망을 이루게 된다. 방 신부는 여기서 더 나아가 1957년 3월 재속회인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제3회’(외부회)를 설립하고, 1962년 10월에는 별도의 수도 공동체 ‘빨마회’를 설립했다.

이어 방 신부는 후암동본당 주임을 끝으로 1957년 5월 6일에 자신도 직접 수도회에서 종신서원을 하고 입회, 수도생활에 전념했다. 그리고 동시에 수도회 소속 수사 및 수녀들의 영성 지도신부를 맡아 1981년까지 재임했다.

이 시절 그의 열정은 놀라운 것이었다. 오직 철저한 낮춤의 기도와 묵상 및 관상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났으며, 불같은 열정으로 완덕을 위해 매진했다. 특히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땀 흘리며 가르쳤다.

그의 사상은 단순히 유럽 그리스도교 사상 및 철학을 한국인 입장에서 변형, 수용한 차원이 아니었다. 철저히 한국인의 정서와 사고방식, 언어, 감정으로 하느님을 말씀을 들었으며 이해하고 사유의 깊이를 심화 시켰다. 특히 모든 사도직 활동은 관상에서부터 출발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온 중심 사상이 바로 점성정신(點性精神), 침묵(沈默), 대월(對越), 십자가의 비결(秘訣), 면형무아(麵形無我) 등이다. 방 신부는 자신의 호도 ‘무아’(無我)라고 지었다.

방 신부의 영성은 어쩌면 아직까지도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서양의 사상을 형식적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내용적으로 통합해 내기란 오늘날의 후학들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풍부한 한국교회의 유산을 한쪽에 밀어 놓는다는 것은 신앙 후손들의 도리가 아니다.

어렴풋하게나마 방 신부가 사유한 주제들을 눈감고 더듬어 본다면, 그 내용은 이렇다.

▨ 방유룡 신부가 창설한 한국순교복자 수도회 가족

▲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인 1946년 개성에서 창설된 방인 수녀회. 한국 순교선열들의 순교 정신으로 생활하며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1951년 12월 교황청 인가를 받았다. 본원은 서울 청파동에 있다. ※문의 (02)707-5500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1953년 창설된 방인 남자수도회. 서울 제기동본당 부속건물에서 시작됐으며 1956년 교황청의 인가를 받았다. 창설된 이듬해인 1954년 명동성당 부속건물로 임시 이사한 뒤, 1955년 현재 본원이 위치한 서울 성북동에 흙벽돌집을 만들어 입주했다. ※ 문의 : (02)744-4702

▲ 한국순교복자 빨마수녀회

1962년 창설되고 1992년 부산교구 인가를 받았으며 1996년 현재의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점성, 침묵, 면형무아의 삶을 통해 구원사업의 협조자로서 하느님 나라 완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문의 : (051)582-4997

▲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제3회(외부회)

복자회 가족의 일원으로 사도직을 수행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서울지구는 1957년 3월에, 부산지구는 같은 해 10월에 각각 시작됐다. 회원들은 성가정과 성모님을 본받아 가정생활을 하면서, 수도회 영성을 바탕으로 완덕을 위해 정진하며, 이웃에 복음을 전할 것을 서원한다. ※ 문의 : (02)707-5513, (051)582-2920

방유룡 신부는 한국적 영성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구현해내는 남녀 수도회를 세우겠다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수도회 건립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