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교회 창립 선조를 찾아서] (11) 이승훈 (2)

입력일 2010-01-26 수정일 2010-01-26 발행일 2010-01-31 제 2683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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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서 성물·천주교 서적 들여와
북경으로 가고 있는 이승훈 성현 을 묘사한 성화(탁희성 작품).
갑진년(1784) 봄에 이승훈 성현은 북경에서 얻은 많은 책과 십자고상, 상본과 성물을 몇 가지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에게 제일 급한 것은 이벽 성조에게 자기 보물의 일부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동안 날을 세어가며, 사신들의 귀국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이벽 성조는 이승훈 성현이 가져온 많은 서적을 받자마자, 외딴 집을 세내어 독서와 묵상에 전념하기 위하여 들어갔다.

이벽 성조께서는 천주교 진리에 대한 더 많은 논증 방법 서적과, 중국과 조선의 여러 가지 미신에 대한 더 철저한 반박 서적, 7성사의 해설서, 교리문답과 복음성서의 주해, 그날 그날의 성인행적과 기도서 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그는 천주교라는 것이 어떠한 종교인지를 전체적으로, 또 세부적으로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책을 읽어 가면서 새로운 생명이 자기 마음속에서 움터 나오는 것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신앙은 이렇게 생장하고 있었고, 신앙과 더불어 자기 동포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알려주고자 하는 의욕도 커갔다.

얼마 동안 연구한 뒤에, 자기 은둔처에서 나온 이벽 성조는 이승훈과 정약전·약용 형제를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도리이고 참된 길이오. 위대하신 천주께서는 우리나라의 무수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가 그들에게 구속의 은혜에 참여케 하기를 원하시오.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오.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 수가 없소. 천주교를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오.”

이리하여 우리나라 선비로서 처음으로 정식 세례를 받게된 이승훈 성현은 자신을 북경에 파견한 이벽성조와 그 동지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승훈 성현으로부터 ‘요한세자’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은 이벽성조는 그때부터 전교에 나서서, 권철신 형제와 정약종·약전·약용 삼형제와 중인이던 김범우 등에게 세례를 주고, 차차 믿는 사람이 늘어감을 보고, 서울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선생의 집을 교회로 삼아, 이승훈 성현과 함께 최초의 주일행사를 지내게 되었다. 머리에 책건을 쓰고, 집회에 모인 수십명의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자신이 처음 창립한 조선 천주교회를 더욱 튼튼히 발전시켜 나갔다.

이와 같이 밖으로부터 어떠한 성직자가 들어와 전교함이 없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은 온 세계의 전교 역사상에 있어서,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이때부터 우리 선조들은 서로 교우라고 불러, 엄격했던 그때의 계급제도를 타파하면서, 조상의 신주를 신처럼 모심을 걷어치우고, 언문이라고 불러 업신여기던 한글로써 한문 교리책을 번역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세워진 조선 천주교회는 이듬해 1785년 3월에 관헌에게 발각되어 해산되고, 그 집을 교회로 쓰게 하였던 역관 김범우선생은 잡히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단장으로 귀양가 2년 후 즉 1787년 정미년 음력 7월 16일에 장독(杖毒)으로 죽으니, 2년 전 을사박해 당시에 순교한 이벽 성조의 뒤를 이어 한국천주교회가 두 번째 바치는 순교제(殉敎祭)가 되었다. 이리하여 모처럼 세워진 교회가 첫 박해를 받게 되니, 이승훈 성현은 문중의 유림으로부터 또 가정의 형제들로부터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 자료출처 : 천진암성지 홈페이지(chonjin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