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제의 해 기획-사제의 사제 Ⅱ] 2. 방유룡 신부 (상)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1-20 수정일 2010-01-20 발행일 2010-01-24 제 2682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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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 원했던 사제
한국순교복자수녀회 김춘희(안드레아 클라라) 수녀는 지난해 박사학위 논문 「동방의 빛 -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해석학적 전기와 통합 신비 영성의 심리학적 합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방 신부님은) 살아계실 때 너무 작은 점과 같아 시대가 그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의 통합 신비 영성과 면형무아 심리학은 다가올 영성의 시대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모형이 될 것이 분명하다.”

동서 사상의 융합을 통해 한국적 신앙 사유의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무아(無我) 방유룡 신부(1900~1986)는 동서 사상을 아우른 창조적 생명 철학자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와 비교된다. 하지만 유영모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새로운 통합적 사유 체계를 제시했다면, 방유룡 신부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동양적 그리스도교 영성을 정립했다.

이야기는 19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방유룡 신부는 그 해 3월 6일 서울 정동(서소문 안 대한문 옆)의 한 궁내부(宮內部) 주사(主事)로서 영국공사관의 통역관이었던 아버지 방경희와 어머니 손유희 사이에서 육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방 군수로 발령받고도, ‘지방관으로서 향교제사(鄕校祭祀)를 지내야 하는 부담감’때문에 관직을 고사할 정도로 신앙에 열심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아 방 신부는 태어난지 3일 만에 명동성당에서 ‘레오’라는 세례명으로 유아 세례를 받았다.

방 신부는 어린 시절 특히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할아버지 방제원은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Mutel, 閔德孝)주교와 만주 연길 교구장이었던 블랑(Blanc, 白圭三)주교에게 한문을 가르칠 정도로 뛰어난 한학자였다. 훗날 방 신부의 한학에 대한 뛰어난 식견 또한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방 신부의 미래를 미리 보았을까. 할아버지는 방 신부에 대해 입버릇처럼 “장차 가문을 일으켜 세울 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9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거의 동시에 병사(病死)한 것이다. 이후 가세가 기울었고, 소년 방유룡은 정상적으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결국 늦은 나이인 14살 때 정동관립보통학교 입학, 16살 때 졸업했으며, 이후 미동농업학교에서 2년간 수학했다. 하지만 많은 나이 탓에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던 방유룡에게 새로운 길이 열린다. 우연히 소신학교의 전신(前身)이었던 용산 벽암정 신학당의 학생 모집 소식을 듣고 입학하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동료 신학생들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이 많았다.

동창 신부들의 증언에 의하면, 신학교 입학 직후 그의 모습은 ‘종로 깍쟁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밉상이었다. 늘 멋쟁이 건달처럼 꾸미고 다녔으며, 잘난 척했다. 씀씀이가 사치스러워 교수들로 하여금 사제성소를 의심하게 만들기도 했다. 도무지 신학생답지가 않았다. 그래서 일부 교수 신부들은 그를 퇴교 조치하기로 한다. 하지만 한 교수가 나서서 설득했다. “방유룡 집안의 신앙과 삶을 보아서라도, 일 년 동안만 더 두고 봅시다.” 결국 방유룡은 간신히 퇴교 조치를 피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방 신부의 동료였던 임충신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방유룡은 신학교에서 쫓겨나거나 아니면 자진해서 나갈 사람이지, 신부는 못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방학 후에 별안간 변해서 들어왔습니다. 자기가 선언하기를 ‘오늘부터 나 성인 된다’고 한 후로는 엄격하게 규칙을 지키면서, 말도 잘 안하고, 화도 안 내면서 새까만 무명 두루마기에 동정도 안 달고 입고 다녔습니다. 그런 경과를 겪고 신부가 된 후도 가장 열심이었습니다.”

방유룡은 달라졌다. 규칙을 엄격히 지켰고, 침묵을 사랑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았다. 옷차림도 확 달라졌다.

이즈음 방유룡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동료들로부터 ‘루나 띠꾸스’(달에서 사는 사람)라는 라틴어 별명을 얻기도 했다. 어떤 동료들은 또 수도 생활을 하는 듯한 분위기 때문에 ‘수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실제로 신학생 방유룡은 수도생활에 대한 원의를 품고 수도회 입회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에 진출한 외국 수도원 몇몇 곳을 방문했는데, 이 과정 중에 자신의 특별한 소명은 외국 수도원의 입회가 아니라 순수한 한국적인 수도원을 건립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소신학교를 졸업한 후, 방유룡은 대신학교 6년 과정을 마치고, 1930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당시 나이 30세였다. 함께 서품 받은 사제는 노기남, 윤형중, 임충신, 양기섭 등이었다.

방유룡 신부의 첫 부임지는 강원도 춘천본당이었다. 이후 황해도 장연본당의 보좌신부를 거쳐, 1933년에는 황해도 재령본당의 주임신부가 된다. 이어 1936년에는 해주본당 주임에, 1942년에는 경기도 개성본당에 각각 부임했다.

본당 생활 가운데서도 방 신부는 수도원 지망자들을 특별히 사랑하고 지도하는데 대단한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방 신부 자신이 신학교 시절부터 수도생활을 원했고, 완덕에 이르러 성인이 되고자 하는 원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방유룡 신부에게 있어서 본당 사목을 하던 기간 15년은 수도원 건립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그는 한 번도 수도생활에 대한 원의를 잊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을 원했다. 하지만 그는 기존 수도회에 입회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