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대희년 그 후 10년 - 한국교회 무엇이 달라졌나] (4) 생명의 소중함과 함께해 온 10년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1-20 수정일 2010-01-20 발행일 2010-01-24 제 2682호 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반생명문화 적극 대응 … 법률 제정 등 성과
과학·경제논리 앞세운 이익집단과 첨예하게 대립
생명31운동 통해 생명의 수호자 역할 충실히 수행
2007년 9월 주교회의 생명31운동본부와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생명수호대회에서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맨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 주교단과 신자들이 생명수호를 염원하는 촛불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다.
2000년 대희년 벽두,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생소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배아 복제 등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인한 생명 파괴 문제였다. 낙태 문제에 대해서도 사회에서는 용인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당시 대한의협은 낙태, 대리모, 생명복제 등과 관련해 교회의 윤리적인 입장과 배치되는 의사윤리지침을 발표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

청주교구가 2000년 3월 ‘모자보건법 폐지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교회의 생명에 대한 관심이 새천년 들어 처음으로 가시화된 것이었다. 전국 각 교구는 청주교구를 중심으로 이 법 조항의 폐지를 위한 서명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으며 총 123만1081명의 서명이 주교회의에 전달됐다.

주교회의는 더 나아가 2001년 신앙교리위원회 산하에 생명윤리연구회를 설치해 새롭게 나타나는 수많은 생명윤리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고 신자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생명문화 건설에 매진해야 함을 선언했다. 하지만 2002년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안)’문제가 불거지면서 종교계를 비롯한 시민단체와 생명과학계, 산업계의 논쟁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첨예하게 대립됐다.

이에 교회는 2003년 ‘임신한 날부터 28주 이내에 제한적으로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허용한 모자보건법 제정(1973년 2월 8일) 30주년’을 맞아, 반생명문화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생명문화를 만들어가자는 취지에서 ‘생명31운동’을 전개한다. 이는 생명의 수호자로서 교회의 위상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다.

주교회의의 의지는 각 교구 차원으로 확산됐다. 서울대교구는 2005년 생명위원회를 발족했으며 2006년에는 ‘생명의 신비상’을 제정해 성체줄기세포 연구 등 난치병 치료와 계몽활동을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서울대교구는 특히 2007년 아시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가톨릭대학교에 생명대학원을 설치하기도 했다. 또 군종교구도 ‘생명가정수호 모범상’을 제정(2003년)하는 등 생명운동을 사회 문화운동으로 승화시키는 주춧돌을 놓았다.

2008년은 생명에 대한 또 다른 큰 걸음을 내딛은 한 해였다.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인간생명’ 반포 40주년을 맞은 그해, 주교회의는 춘계 정기총회를 통해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생명윤리연구회를 ‘생명윤리위원회’로 격상시키고 보다 강화된 활동 지원 체계를 마련했다.

이에 서울대교구도 생명수호 운동의 첨병으로서 각 본당 차원에서 ‘생명수호 담당자’ 제도를 실시하는 등 ‘생명 문제 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가톨릭대학교 가톨릭중앙의료원(원장 최영식 신부)도 보다 많은 이들을 생명 나눔의 선순환 구조에 동참시키고자 ‘CMC(가톨릭중앙의료원) 생명존중기금’을 조성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반생명문화에 적극 대응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생명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법률 제정 등 가시적인 효과도 거뒀다. 한국교회는 그렇게 스러지려는 생명의 손을 잡고 지난 10년을 쉼 없이 달려왔다. 힘들었지만 지켜야할 가치를 지켜낸, 보람 있었던 옹고집 10년이었다.

2000년 청주교구에서 실시한 모자보건법 폐지 100만 인 서명운동.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