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제의 해 기획-사제의 사제 Ⅱ] 1. 선종완 신부 (하)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1-13 수정일 2010-01-13 발행일 2010-01-17 제 2681호 7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자기 희생이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
선종완 신부가 세례를 받은 용소막성당 전경. 이곳에 마련된 선종완 신부의 유물관에는 선 신부의 유품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성경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경청과 겸손의 사제였다. 선종완 신부는 사람을 만나면 늘 먼저 머리 숙여 인사하고 “네, 그렇군요” “네,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성모상 앞을 지날 때도, 신학생을 만나도, 심지어 마을 어린아이를 만날 때도 늘 먼저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런 그가 큰 사건 하나를 저지른다. ‘거룩한 말씀의 삶’을 영성으로 하는 성모영보 수녀회를 설립한 것이다. 1960년 3월 25일의 일이다. 올해 50주년 맞는 이 수녀회는 1963년 1월 10일 교황청 인가를 받았고, 1969년 8월 22일 수원교구 소속 첫 방인 수녀회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선 신부는 수녀들에게 어떤 삶을 원했을까. 그가 원한 수녀들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조금 긴 내용이지만 선 신부의 영성과 뜻을 알기 위해 그가 수녀들에게 한 말을 옮겨 본다.

“가난하고 공부하지 못한 사람은 수녀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으나 우리 수도회에서는 주님 말씀을 알아듣고 실천하면 수녀가 될 수 있어요. 언제나 침묵 중에 주님과 대화하면서 기도하고 일하십시오. 천주님 말씀 마음에 새겨 피와 살이 되도록 하십시오. 주님과 일치하여 주님을 닮아 겸손되이 완덕에 도달하도록 노력하십시오. 항구히 착하게 살아 성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선 신부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수도자는 다른 사람이 바라볼 때 그리스도나 성모님 같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야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도 즐거운 표정을 짓는 일이 가능해야 합니다.”

믿음 하나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았다. 수녀들은 가축을 기르고, 밭에서 김을 매고, 산에 가서 땔감을 해오는 등 고된 생활을 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저녁 9시에 끝나는 수녀원 일과시간동안 선 신부는 기도와 묵상, 미사, 독서, 노동으로 똑같이 함께했다. 움막 같은 흙집에 짚으로 만든 돗자리 하나 깔고 생활했던 선 신부는 식사도 보리밥, 강냉이밥, 고구마밥으로 만족했다. 서울 신학교까지 강의를 위해 이동할 때는 작은 스쿠터를 탔는데, 겨울에는 손과 발이 얼 정도였다. 얼마나 가난했는지 수녀원 설립 5년 후에 겨우 미사를 위한 오르간 한 대를, 그것도 할부로 구입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가난한 생활을 이어가는 중에도, 수녀원에 일주일치 이상의 식량을 쌓아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주일분 이상의 여유가 생기면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 소외된 이웃들에게 나눠 주라고 말하곤 했다.

그만큼 선 신부의 삶은 청빈, 그 자체였다. 스스로도 “다른 것은 몰라도 저는 청빈에 관한한 주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 정도다. 실제로 1967년 수녀원을 과천으로 옮긴 후 지은 그의 사제관은 10평이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그리고 책과 몇 벌의 옷, 신학교 강의를 위해 출퇴근용으로 쓰던 고철값으로도 쳐주기 힘든 고물 스쿠터 하나가 소유의 전부였다.

그렇게 가난 속에서 참 행복을 만끽하던 중, 선 신부는 역사에 남을 ‘큰 일’에 참여하게 된다. 1968년 천주교와 개신교가 공동으로 성경을 번역하게 됐는데, 이때 선 신부는 가톨릭 측 유일한 구약성경 번역자로 참여한다. 개신교 측 번역가는 문익환 목사와 박노순씨였다. 고난의 길이었다. 특히 아랍어는 선 신부밖에 몰라서 다른 위원보다 더 많은 분량을 번역해야 했다. 어두운 등잔불 아래서 밤새 작업하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시력이 크게 나빠졌다. 당시 함께 번역작업에 참여한 문익환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신명기 번역 독회 때의 일이었다. 선 신부님은 만족한 표정으로 ‘이제 하느님은 한국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군’하시는 것이었다. 좋은 성서 번역 외에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 선 신부님의 입에서 말고 그 누구의 입에서 이런 기막힌 말이 나올 수 있으랴, 이 말에 담겨 있는 그의 허심탄회하고 담담한 심정에 나는 겸손히 머리를 숙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성경 번역과 수녀원 기반 마련을 위해 하루 24시간을 쪼개서 바쁘게 보내던 중 선 신부의 건강에 이상이 발견됐다. 1976년 5월 9일 성모성월 두 번째 주일이었다. 선 신부는 매우 피곤해했다. 서울 혜화동 신학교 언덕을 올라갈 때는 힘이 들어 몇 번이나 길가에 앉아 쉬어야 했다. 이어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지나가던 신학생이 부축해서야 간신히 걸을 수 있었다. 그날 밤, 혼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이를 악물고 고통을 이겨낸 선 신부는 새벽 통금이 해제된 후에 병원에 갔다. 9일간 요양을 하다가 병원비 걱정 때문에 스스로 퇴원한 선 신부는 재발한 통증으로 인해 병원에 재입원해서야 정밀진단을 통해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있었다. 간암이었다. 병원에서는 과로가 원인이라고 했다.

7개월 후…. 치료가 중단됐다. 가망이 없었다. 임종만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선 신부는 무서운 고통을 진통 주사 한번 맞지 않고 인내로 이겨냈다. 당시 간호하던 이들은 선 신부가 고통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거나 짜증내는 모습을 한번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김수환 추기경, 교황대사, 대신학교 교수 신부들, 각 수도회 장상 및 은인들이 달려왔다. 1976년 7월 11일. 선 신부는 그렇게 향년 62세의 나이로 한국교회 곁을 떠났다.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말씀을 남겼다. 60, 70년대 가족계획과 산아제한이 대세이던 시절 선 신부는 “인구가 부족하다. 앞으로 외국 사람들을 불러와서 일을 시켜야 할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일하지 않으려면 먹지도 말라며 노동의 신성함을 가르쳤고, 육신을 위해 애쓰는 만큼 영을 위해 노력하라 했고,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배우고 깨닫자고 했다. 또 자기 희생은 영혼의 양식이라고 했으며, 성덕으로 나아가라 했고,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기쁨을 만끽하라고 했다. 예수성심과 성모 영보의 신비에 대한 깊은 묵상도 요청했다.

1976년 7월 13일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장례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선 신부님만큼 주님을 깊이 믿고 사랑하고 특별히 죽음을 포함한 고통까지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분을 드물게 보았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주님께 기도드리면서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하는 그 말씀을 하시듯이 주님의 은총 속에서 선 신부님은 운명하셨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데 당신의 전생애를 바치신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선 신부가 세상을 떠난지 9개월 후, 공동번역 구약성서가 발행됐다.

* 선 신부의 유해는 과천 성모영보수녀원 뒷산에 안장돼 있으며, 관련 유품 등은 원주교구 용소막성당 유물관에 전시돼 있다.
선종완 신부의 생가터에 세워진 비석. 용소막성당에서 5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이곳에서 선 신부는 사제의 꿈을 키우며 성장했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