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제의 해 기획-사제의 사제 Ⅱ] 1. 선종완 신부 (상)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9-12-28 수정일 2009-12-28 발행일 2010-01-03 제 2679호 11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다방면에서 ‘넓은’ 사제여야 합니다”
선종완 신부가 세례를 받은 용소막성당 옆 ‘사제 선 라우렌시오 유물관’ 앞에 서 있는 선종완 신부의 동상.
사제의 해(2009.6~2010.6)가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사제의 신원을 되돌아보고 그리스도의 참 제자됨을 묵상하는 사제의 해를 맞아 가톨릭신문은 지난 6개월 동안 비안네 신부 등 외국 교회 사제들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2010년 새해부터는 한국교회 사제들의 모범들을 찾아 가려고 합니다. 앞서간 사제들의 삶과 영성을 통해 사제의 해의 진정한 의미를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해 6월 사제의 해를 개막하는 날, 서울대교구 중서울 지역 사제들은 ‘선종완 신부님의 삶을 통한 가르침’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들었다. 강사는 당시 원주교구 총대리 정인준 신부였다. 사제들이 사제의 해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선종완 신부’를 떠올린 것이다. 강의에서 정인준 신부는 선종완 신부(라우렌시오·1915~1976)가 은경축 때 신학생들에게 당부했던 말을 전했다.

“넓은 사제여야 할 것입니다. 학문에도 조예가 깊고 덕행 면에서도 남을 선도할 수 있는 산상의 등불이 되어야 하며, 그저 사회의 생활 방식을 따라가는 사제가 아니라, 현실 파악에 어둡지 않은 지혜로운 사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선 신부가 신학생들에게 한 말은 그의 삶 자체였다. 그는 넓은 사제였고,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덕행 면에서도 등불이었다. 또 사회의 생활방식을 따라가는 사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사는 지혜로운 사제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든 말과 신념을 철저히 실천으로 옮긴 사제였다.

선종완 신부는 1915년 강원도 신림면 용암리에서 아버지 선치태(라파엘)와 어머니 정치영(카타리나) 사이에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신앙에 열심했던 부모의 영향으로 3일 후 용소막성당에서 라우렌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용소막성당은 풍수원성당과 원주성당에 이어 강원도에서 세 번째로 건립된 성당이다. 선 신부의 생가는 성당에서 고작 50여 미터도 안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정 형편은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는 신림면 일대에 수만 평의 임야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전답만 1만 평에 이르렀다. 공장도 여러 곳을 경영하는 등 지방의 유지였다. 부잣집 3대 독자 외아들, 소년 선종완은 부족한 것 없이 자라났다. 흔히 그 또래 그 환경 아이들이 그렇듯 소년 선종완은 개구쟁이였다. 동네 아낙네들의 물동이질을 나무 막대로 방해하는 등 장난기가 심했다. 그럴 때마다 소년 선종완은 아버지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한번은 하루 종일 돼지우리에 갇히는 벌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는 외아들의 버릇이 나빠질까 엄하게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장난꾸러기 소년 선종완은 그러나 학업에 있어서는 놀라운 재능을 보인다. 초등학교 시절 한번도 1등을 놓친 일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 자라나면서 성소에 대한 결심도 점차 굳어져 간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본당 신부의 강론하는 모습을 자주 흉내내는 그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그는 늘 “신부가 되겠다”고 했다.

1929년 3월 원주 봉산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서울 동성상업학교(소신학교)에 입학했다. 10대 1의 경쟁률 속에서 시골 학교 출신 소년이 당당히 실력으로 합격한 것이다. 당시에는 갑(甲)반과 을(乙)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갑반은 일반 학생이고 을반은 사제 지망생들이었다. 선 신부는 1학년을 갑반에서 공부한 후 2학년 때 소망하던 을반에 들 수 있었다. 1학년 동안, 선종완은 여전히 시골 갑부 아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테니스를 즐겼고, 운동복과 모자 등도 최고급으로만 사용했다.

그런데 2학년 신학교 과정으로 접어들면서 소년 선종완의 태도가 돌변한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과묵했으며, 특히 규율을 잘 지켰다. 당시 소신학교는 복도에서는 말을 하지 못하는 규칙이 있었는데, 한번은 복도 청소를 하는 선종완에게 사감 신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러자 소년은 사감 신부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 후 그곳에서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 그를 두고 주위에서는 ‘성인 사제가 될 신학생’이라고 불렀다.

당시 혜화동본당 주임 신부였던 오기선 신부는 가톨릭신문 1977년 7월 17일자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저 학생은 수도원 길을 신학교 길로 착각했다고 동창들에게 속삭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소신학교와 대신학교 동창인 박성춘(레오) 신부도 이렇게 회고한다. “소신학교 시절부터 그는 신부보다는 수도자가 되는 것이 더 맞을 거라는 평을 들었다. 학우들과도 필요 없는 대화는 일절 나누지 않고 농담도 할 줄 몰랐다. 성인 이야기를 즐겨했을 뿐이다.”

그가 얼마나 규칙을 철저히 지켰는지, 얼마나 사제직에 충실했는지는 다음의 일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방학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소년 선종완에게 사감 신부가 말했다.

“집에 가면 여자를 조심하고 가까이 하지 말아라. 여자는 마귀같은 존재여서 유혹당하기 쉬우니 얼굴도 쳐다보지 마라.”

소년 선종완은 이 말을 철저히 지킨다. 오랜만에 대하는 어머니의 얼굴조차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말을 할 때는 얼굴을 숙이거나 옆으로 돌렸다. 한번은 어머니 대신 다른 아주머니가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소년 선종완은 얼굴을 돌리고 밥상을 받았고, 결국 밥상을 놓치고 말았다. 집에서의 행동이 이 정도라면, 밖에서의 행동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본당 주임 신부가 음악에 상당한 소질을 보인 소년 선종완에게 방학 때마다 성가대 지휘를 맡겼는데,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다보니 제대로 지휘가 될 리 없었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조심스러움은 평생 동안 계속됐다. 사제가 된 후, 한 여성 단체의 지도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소년 선종완은 성당에 가고 있었다. 멀리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소년은 여자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걸었다. 그러다…. 길가 전봇대에 머리가 부딪히고 말았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