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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해 기획-사제의 사제] 7.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상)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9-12-16 수정일 2009-12-16 발행일 2009-12-20 제 2677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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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신심 깊었던 ‘자비의 순교자’
수인번호 16670.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대신 죽음을 맞이했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영향을 받아 유난히 강한 성모 신심을 가졌던 콜베 신부는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창설해 기도, 좋은 표양, 고행, 그리고 노동의 삶을 실천하며 살았다.
1941년 7월 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수감자가 탈출했다. 수용소 규칙에 따르면 한 사람이 탈출하면 다른 죄수 10명이 끔찍한 지하 감방에서 굶어 죽어야 했다.

수용소장은 죄수들을 불러 세워 놓고 아사감방으로 갈 희생자 10명을 골라냈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울며, 동료들과 마지막 작별을 나눴다. 그런데 10명에 속하게된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라는 사람이 갑자기 울부짖으며 말했다. “저에게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습니다. 죽기 싫어요!”

그때였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수인번호 16670,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Maximilian Kolbe)였다.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지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굶주림 속에서 하나 둘 죽어갔다. 하지만 콜베 신부는 2주 이상 물과 음식 없이 생존했다. 그러자 독일군은 콜베 신부를 포함한 나머지 생존자 4명에게 독약을 주사했다. 1941년 8월 14일, 콜베 신부 나이 47세였다. 콜베 신부의 시신은 이튿날인 8월 15일, 수용소내 한 화장장에서 소각되었다. 평생 동안 깊은 성모 신심 안에서 머물렀던 콜베 신부의 몸은 그렇게 성모승천대축일에 한줌의 재가 됐다.

생애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인 부부 율리오 콜베와 마리아 다브로프스카는 눈이 총명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둘째 아들 ‘콜베’를 얻었다. 태어난 후 바로 ‘라이문도’라는 세례명을 받은 콜베(‘막시밀리아노’라는 이름은 훗날 수도회 입회 뒤 착의식에서 받은 이름이다)는 어릴 때부터 부모의 영향을 받아 유난히 강한 성모 신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07년에 콜베 성인은 14세의 나이에 라부프 소신학교에 들어갔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다. 이때 장상들은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인 콜베를 로마로 유학 보낸다(1912년).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신앙적으로도 갈수록 깊이를 더해가는데, 특히 1917년 폐결핵을 앓던 중에도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창설했다. 성모의 기사가 실행해야 할 것은 기도, 좋은 표양, 고행, 그리고 노동이었다. 이듬해인 1918년 4월 28일 사제 서품을 받은 콜베 신부는 1919년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해 고국인 폴란드로 귀국해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콜베는 본격적인 ‘성모 기사회’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22년 1월에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창간(이 잡지는 현재 한국에서도 발행되고 있다)했다. 처음 5000여 부 발행되던 잡지가 1925년 1만 부, 1926년 4만 5000부, 1927년 5만 부, 1935년 70만 부, 1940년에 100만 부 등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콜베 신부는 또 1935년에 가톨릭신문을 발행했는데 이 신문도 크게 성장했다. 콜베 신부는 이 모든 것을 성모님의 전구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겼다.

이후 우연한 기회에 일본 학생들과 만나 대회를 나눈 콜베 신부는 동양 선교에 대해 사명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즉시 일본 선교를 희망, 1929년 12월 30일 폴란드를 떠나 이듬해 4월 24일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그는 성모의 기사를 발행했으며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였다.

이후 6년 후, 콜베 신부는 폴란드의 성모의 마을 원장에 선출되어 폴란드로 귀국한다. 이때 그는 전쟁으로 인한 심한 박해와 시련, 특히 자신의 고난을 자주 예고했다고 한다. 결국 1939년 9월 독일 군대가 폴란드를 침범했으며, 콜베와 동료 수사들을 체포해 수용소에 억류했다가 석방했다. 콜베 신부는 이후 1941년 2월 17일 유대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다시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파비악 형무소에 갇혔으며 2월 28일 아우슈비츠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6개월 후 생을 마감했다.

콜베 신부는 1903년 일본으로 가기 위해 한국의 부산에 잠시 들른 일이 있다. 그때 동생 신부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멈춘 부산에서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린 후 배를 타려면 4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는 것을 이용해 미사를 드리고 싶었다. 한 경찰관으로부터 그 도시엔 여섯 개의 개신교 교회가 있다는 것과 성당은 한국을 통틀어 세 개쯤 될까 말까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언제쯤 성모께서 이처럼 아름다운 나라에 당신 아드님의 나라를 세우실까?”

▨ 콜베 신부는 1971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자비의 순교자’(Martyr of Charity)라는 칭호로 시성하였다.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깊었고, 또 성모 마리아에게 매우 특별한 공경을 바친 성인이다.

▨ 성모기사회

성모기사회는 1917년 10월 16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가 창설한 국제 성모신심 단체다. 회원들은 원죄없으신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죄인들의 회개, 이교도,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 및 개인 성화를 위해 활동한다. “성모기사회의 목적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통하여 모든 이의 구원과 성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는 모든 은총의 중재자이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은총없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습니다.”(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모기사회는 현재 5개 대륙 50여 개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창설 이후 현재까지 550여 개 지부와 30여 개 본부가 교회법에 따라 설립됐고, 전체 회원 수는 약 400만 명에 이르고 있다. 한국 본부는 경기도 양평에 소재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성 정하상 바오로 수도원’에 위치하고 있다.

※문의 031-771-6133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