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교회 창립 선조를 찾아서] 1. 이벽 (7)

입력일 2009-12-15 수정일 2009-12-15 발행일 2009-12-20 제 2677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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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이씨 모두가 천주학 배워야”
이벽 성조는 아버지의 자살시도와 경주 이씨 문중의 핍박 속에서도 천주학을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사진은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성지를 알리는 표지판.
▨ 한국 천주교회가 최초로 겪는 을사박해와 이벽 성조의 장렬한 최후 (2)

이벽 성조의 아버지 이부만 장군은 아들 이벽 성조를 불러 놓고 달래기도 하고, 야단치기도 하고, 위협도 하는 등 갖가지 수단을 다 써가면서 천학운동을 하지 말 것과,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잘못을 빌도록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문중에서는 평창 이씨 집안에서 이승훈 선생의 사과와 라주 정씨 집안에서의 정약용 등의 사과 소식을 들은지라,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이벽 성조의 태도에 대하여 한층 더 격분하였다. 그래서 서울 시내 양반들의 통문이 사방으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규탄의 모임과 소리가 요란한데다가, 이 압력에 더 한층 불붙어서, 경주 이씨 문중회의는 더더욱 격렬하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따라서, 성질이 급한 이부만공은 펄펄 뛰며, 아들 이벽 성조를 집안에 앉혀 놓고, 발을 굴렀다. 온갖 수단 방법으로도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는 아들의 굳은 마음과 의지를 보고, 아버지는 이제 아들의 마음을 돌린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느끼고, 모든 것을 포기 하고 아들도, 세상도, 명성도, 가정도 다 버리는 마음으로, 자살의 길을 택하기에 이르렀고, 대들보에 노끈을 걸어, 목을 매달기에 이르렀다. 이부만공은, 둘째 아들이 천학을 함으로써 인하여, 족보가 삭제되고, 상놈이 되는 동시에, 가족들이 벼슬에서 모두 떨어져서 패가망신을 하고 살아가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천학을 하는 이벽 성조가 보는 앞에서 목을 매달아 죽기를 결심하고, 주저없이 실천에 옮기었다.

이부만공이 목을 매달게 되자 온 집안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과, 자녀들과 친척들과 벗들이 모두 이벽 성조에게 달려들어 아버지의 목매달은 모습을 보이며 야단을 쳤다. 특히 그 어머니는, 아들 이벽 성조에게 “천학이 아무리 좋은 종교라지만, 아버지를 목매달아 죽게 하는 그런 종교를 누가 믿으란 말이냐? 아버지가 목매달아 죽는데도, 그래도 천학운동을 하러 다니겠다는 말이냐?”하며 애원과 탄식과 절규로 부르짖었다. 이벽 성조께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한국사회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사회윤리의 제일로 삼는 때였다. 사실 아버지를 목매달아 죽게 하는 종교로 알려지면, 아무도 이러한 종교를 믿을 사람이 없었다. 형제들과 친지들과 어머니는 애걸하며 절규하였다.

“지금 아버지가 저렇게 목매달아 죽는데도, 그래도 그 천학인지 무엇인가를 또 하러 다니겠느냐?”

이벽 성조께서는, 우선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하여, “그럼 안나가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이었다고 달레는 기록하였다. 이벽 성조께서는 그때까지 명례방 김범우 선생네 집으로 마재 정약종네 집으로, 양근 권철신네 집으로, 이리저리 천학강론을 하러 항상 나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서울시내가 소란하고 양반문중마다 종친회가 열려 시끄럽고, 가정이 불목으로 극에 달하여, 아버지가 목을 매달고 있으니, 이 상태에서 천학을 강의하러 다닐 수도 없고, 또 다녀도, 김범우 선생은 감옥에서 혹심한 매를 맞고 있고, 양반집 문중마다 천학배척의 기운이 감돌며, 반발과 규탄이 요란하므로, 실제로 당분간 다니며 전처럼 활동하는 것을 줄이고, 조용히 즉 집안과 문중이 가라앉을 때까지, 좀 고요히 있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즉시 목을 매달고 있는 이부만공, 즉 남편에게 아들 이벽 성조가 이제 천학운동을 하러 나가지 않겠다고 하였으니, 죽지 말라고 하여 끈을 풀자 집안이 잠시 조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형제들과 친척들이 모두 천학을 하러 안나가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일로써, 아버지도 구하고 가정도 구하고, 문중의 체면도 살려주는 지극히 마땅한 처신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부만공은 사람을 문중회의로 보내어 아들이 천학을 하러 나가지 않기로 하였으니 모두들 안심하고 족보는 삭제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문중회의에서는 특히 강경파 편에서는 이를 신용하지 않았다. 평소부터 천학도사 이벽 성조가 어떠한 인물이며, 그 기백이 어떠한 지를 잘 알고 있던 터이므로, 강경파 문중에서는 자신들을 우롱하지 말라고 일축하면서 절대로 신용할 수 없는 일이니 본인 자신이 직접 문중회의에 나와서 자명소를 하라고 하였다. 자명소란 자신의 입장을 자신이 직접 밝히는 것이다.

이부만공은 아들 이벽 성조를 불러서 천학운동을 하러나가지 않기로 하였으니, 문중회의에 출두하여 사과하는 동시에, 자명소를 하고 오라고 말하였다. 즉 천주학을 그만둔다는 것을 직접 본인의 입으로 말함으로써 족보에서 명단이 삭제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벽 성조께서는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기를, “문중회의에는 출두하겠으나, 거기 가서 천주학을 배척하거나 그만두겠다는 말을 안할 것이고, 오히려 우리 경주 이씨 문중 모두가 천주학을 해야 한다는 일장의 강설을 하고 오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사실 이가환, 이기양, 권철신 같은 대학자들이 설복되지 않을 수 없는 깊고 넓은 학식과, 밝고 확실한 논법으로 달변가인 이벽 성조에게 대적할 만한 선비는 경주 이씨 문중에 없었고 경주 이씨 문중에 뿐 아니라, 당시 한국 학계에도 없었다. 그렇지만, 경주 이씨 문중이 들고 일어난 그 참된 원인은 당시 사회 풍습상 경주 이씨들의 체면 손상이 말이 아니라는 점과 또 문중에서 이벽 성조의 가정이 과거에 급제하고 이벽 성조의 인품이 출중하여 많은 선비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어 있어서 사기와 질투심이 자극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상 문중에서는 천학도리에 대하여 깊이 알려하지도 않았고 다만 예로부터 전해오는 전통적 관습에 어긋난다는 점 하나만을 내세우며 집단적으로 소란을 피우며 박해를 가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아버지 이부만공은 아들이 천학운동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문중에 이미 성급하게 통고한 후였기 때문에 이제 아들 이벽 성조께서 문중회의에 자명소하러 나타나서 천주학은 만인이 다 해야 하며 경주 이씨 문중부터 모두가 신봉해야 한다고 강설을 하게 된다면, 아버지 이부만공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고 문중회의를 우롱한 것이 되며 또 이벽 성조의 변론을 비록 머리로는 알아듣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더욱 무섭게 반발할 것이 분명하였고, 따라서 문중에서 족보를 빼어버리며 제명 처분할 것이 확실하였다.

※ 자료출처 : 천진암성지 홈페이지(chonjin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