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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우들 보아라 - 최양업 신부 서한에 담긴 신앙과 영성] 열여덟 번째 서한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09-12-08 수정일 2009-12-08 발행일 2009-12-13 제 2676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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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엄금 법령 공포가 신앙 고백 어렵게 만들어”
최양업 신부가 안곡에 머무르며 번역, 편찬에 참여한 「성교요리문답」은 이 후 70년간 공식 교리서로 사용됐다.
▧ 열여덟 번째 서한에 대하여

최양업이 열여덟 번째로 쓴 서한은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 작성(1859년 10월 11일) 후 하루 간격으로 쓴 리브와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다.

이 편지에서 그는 리브와 신부의 건강과 국내 선교사들, 특히 교구장의 건강이 걱정된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베르뇌 주교는 지병인 신장 결석으로 6월부터 3개월 간 병석에 누워 있었다.

열일곱 번째 서한과 열여덟 번째 서한은 모두 ‘안곡’(현 경북 구미시 무을면 안곡리, 상주시 모동면 금천리 등지로 추정되나 정확하지 않음)에서 작성됐는데, 최석우 몬시뇰은 ‘최양업 신부 서한집’에서 “최 신부는 교리문답의 교정을 하고 있었고, 기도서의 번역도 여름까지 끝내기로 돼 있어 저술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안곡이 적지였던 것 같다”고 전하고 있다.

▧ 안곡에서, 1859년 10월 12일

“항상 건강이 좋지 못하신 존경하올 우리 베르뇌 장 주교님에 대해서도 무척 걱정이 됩니다.(중략) 어떤 선교사 신부님들은 여름 더위에 매우 지쳐 계시지만 다른 신부님들은 그럭저럭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십니다. 저는 항상 건강하게 잘 지냅니다. 그러나 저 혼자 여행을 하기에는 너무 허약합니다. 하루에 고작 40리 밖에 못 걷습니다. 그래서 갈 길이 먼 공소 순방 때는 항상 말을 타고 갑니다.”

‘40리’면 15.7km에 달하는 거리다. 최양업은 멀리 떨어진 지방들은 다 자신이 순방할 지역들이라며 해마다 다니는 거리가 7천리(약 2750km)가 넘는다고 했다. 자신의 관할 구역은 다섯 도에 걸쳐있고, 방문해야할 공소가 100개가 넘어 휴식을 취해야 함에도 쉴 만한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가 없다고 전한다.

최양업은 모든 편지에서 그러하듯 백성들의 한숨과 한탄에 대해서도 빠트리지 않는다.

“참 하느님을 섬기고 자기 영혼이 구원되기를 원하면서도, 천주교를 엄금하는 조선 법령에 대한 공포 때문에 천주교 신앙을 고백할 만한 용기와 담력이 모자랍니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특히 남편과 부모들 지배 아래 있는 여인들이 장애를 받고 날마다 울음으로 지내며 한숨으로 쇠약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최양업은 천주교 신자들의 힘겨운 일상들을 보며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안겨줄까’ 늘 고민해온 듯하다. 천주교를 믿는 다른 국가들의 도움을 빌릴 방법까지도 생각하며 동분서주하는 사제를 보며 우리는 애련함과 애틋함을 동시에 느낀다.

“천주교 국가의 군주들이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많은 영혼들의 안타깝고 참혹한 처지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지체 없이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마련해 주기가 별로 어렵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프랑스정부에서 한번만 공식으로 우리 조선정부에 대해 백성들에게 천주교를 믿을 신앙의 자유를 주라고 요구하는 경고문을 보낸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