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달자의 주일 오후] 정서적 허기를 아십니까?

입력일 2009-12-08 수정일 2009-12-08 발행일 2009-12-13 제 2676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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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는 핑계로 오래 만나지 못한 글쟁이 후배들과 청계천 부근 음식집에서 맛있는 음식과 술을 나누며 모처럼 재미라는 것을 느꼈다. 남의 흉도 적당히 보고, 글쟁이가 갖는 숙명적 고통에 대해,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아름다운 자연에 대해, 가족에 대해, 남편이 왜 가끔 미운가에 대해 수다를 떨며 우리는 늦은 시간에 헤어졌다.

우리 집 수서역 부근에는 새벽 다섯 시까지 포장마차가 오렌지빛의 불을 켜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이름하여 ‘돼지집’과 ‘띵이네’다. 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도 그 포장마차는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 노을빛 불을 깜빡거리며 서 있다. 나는 그 시간에 늘 잠시 동안 포장마차 앞에서 갈등을 느낀다. 배가 고파오는 것이다. 잔치국수나 우동 한 그릇을 확 비우고 소주 한 잔을 한입에 탁 털어 넣고 싶다. 그리고 쓸쓸하게 노랑무 한쪽을 씹고 싶다.

자학 같기도 하고 애정 같기도 한 이 밤의 감정적 무도회는 늘 다음날 배탈이 나거나 퉁퉁 부은 얼굴의 대가를 치르게 한다. 아마도 나는 야식 중독성이 있는지 집에 있을 때도 밤 11시가 넘으면 라면 하나를 끓여 먹고 싶어진다. 자정이 가까운 텔레비전 속 드라마에는 어쩌면 그렇게 맛있게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지.

그런데 왜 나는 포장마차 앞에서 늘 막중하게 허기를 느끼는가. 잘도 먹고 잘도 웃으며, 소리치고 웃고 돌아가는 그 시간에 나는 왜 우동을 또 바라보는가. 어쩌면 나는 마음이 고픈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의 허기를 위장을 채움으로써 대신하고자 하는 얄팍한 생각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런 감정적 모순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어느 정신과 교수는 ‘정서적 허기’라고 단정 지었다.

저녁의 수서역에는 언제나 ‘어서 와’하고 손짓하는 또 하나의 내가 있다. ‘피곤하지?’, ‘한 잔하고 들어가’, ‘배고프지?’하며 내 손을 이끈다. 건강상태가 양호하거나, 생각지도 않은 돈이 생기거나, 내가 쓴 글이 좋다고 두어 사람에게 전화를 받거나, 내 딸들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이상하게 이 정서적 허기가 고개를 숙인다. 없는 듯 조용하다.

그러나 속이 상하거나, 일이 풀리지 않아 전전긍긍하거나, 외롭고 쓸쓸하다고 느낄 때나, 울화통이 터진 날에는 그 정서적 허기가 백배로 늘어나 나를 짓누른다. 이럴 때는 꼭 배탈이 난다.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 먹고, 소화제를 먹고도 사흘은 죽을 먹는다. 완전히 밑지는 장사인 셈이다. 늘 당해도 나는 달라지지 않는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식탐은 늘어나고 고생을 사서 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정서적 허기를 내쫓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신을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일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묵주기도를 시작하거나, 해야 할 일의 속도를 내거나, 새 이름이나 식물이름을 외우거나, 등산을 시작하거나 만보를 걷거나, 마음속 무겁게 누르는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며 그 감정의 딱지를 해소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한 달에 열 권의 책을 읽고, 그 책의 독서 감상문을 써 보는 일도 좋은 해결책 중 하나다. 세 권까지는 지루하지만 네 권부터는 제법 재미가 붙어 오히려 잠을 쫓으며 독서삼매경에 빠질지도 모른다.

사는 일이 그렇다. 누가 재미를 아침우유처럼 배달해 주겠는가. 재미는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다. 신문의 관심 있는 좋은 기사를 오려 붙이고 다시 읽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관심사만 모으면 그것도 좋은 스승이나 친구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만 한다면 실컷 먹고 난 뒤 포장마차의 우동을 또 먹지 않아도 되고, 야식으로 라면을 끓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포만감으로 가득할 때, 우리는 배고프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