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달자의 주일 오후] 유료주차장에서 우는 여자

입력일 2009-12-02 수정일 2009-12-02 발행일 2009-12-06 제 2675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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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본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자동차를 세우고 내리면서 힐끔 쳐다본 옆 차의 운전석은 별로 이상할 게 없었다. 한 여자가 운전석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갑자기 허리를 푹 꺾으며 어깨를 들먹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그녀가 감지할 수 없는 거리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마치 경찰이 범인을 물색하듯 그렇게 몸을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는 몹시 울고 있었다. 코를 풀어 가며 어깨를 강하게 움직이기도 하고, 벌벌 떨기까지 하며, 그녀는 난폭하게 울고 있었다. 하늘은 바보같이 청명하고 맑았다. 아무리 숨겨도 마음까지 드러날 것 같아, 그래서 두려움마저 느껴지던 그날 오후의 그 광경은 심한 충격에 가까웠다.

그곳은 유료주차장이었다. 그녀는 필시 울 곳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집에는 가족들로, 거리에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극장은 고요하고 찻집은 어수선했을 것이다. 게다가 어디 멀리 갈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울음은 복받쳐오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찰나에 유료주차장을 만난 것이다. 뭐든 돈을 내면 안전한 곳이 된다. 그녀는 울 수 있는 장소를 찾았고 기꺼이 돈을 지불한 것이다. 그녀가 왜 우는지는 알 필요가 없다. 살아가노라면 다 그런 때가 있다. 내장이 다 무르녹을 때까지 펑펑 울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나도 오십대에는 울 기운이 있었다. 그런데 육십이 넘으면서 울음은 확실히 흐느끼는 수준으로 변해버렸다. 슬픔과 통곡도 기운을 필요로 하는가 보다. 육십을 넘기면서부터는 와장창 울어 본 기억이 없다. 슬픔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울 기운이 없어진 것이다. 이제 나는 조용히 운다. 그러나 눈물은 굵어져서 볼을 파고 들것만 같다.

젊은 날. 나는 옥상에서 울음 잔치를 벌였다. 앞에는 산이 있었고 주변은 거의 들판이었던 내 젊은 날의 집은 단층집이었다. 식구들이 잠들면 나는 그때부터 울기 시작해 아침을 맞았다. 그냥 눈물이 아닌, 내 살덩이가 녹아내리는 울음을 줄줄 흘리고 진저리치며 울었던 그때 나는 삼십대였다.

사십대에는 성모님 앞에서 성모님께 발길질을 하며 울었다. ‘짐 진 자는 모두 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왜 내 짐은 받아주지 않느냐’며 돌로 만들어진 성모님을 후려치다 손을 다치기도 했다. 피와 눈물로 얼룩진 나의 사십대 시절은 참으로 화려한 만신창이였다. 눈물의 대공연은 오십대에 들어서야 기운을 잃었다. 그때부터는 조용하고 고요하게 몸 안에서 울었다.

울음은 내게 보약이었다고 나는 회상한다. 그 젊은 날의 울음을, 생의 대홍수를 몸 안에 축적했다면 나는 이미 죽었는지도 모른다. 내 눈물에 떠내려 내가 어느 바위에 부딪혀 박살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눈물을 쏟고 나면 몸도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져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는 것을 느끼곤 했다.

나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눈물도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그렇지 아니한가. 몸속에 회오리치는 그 모나고 까칠한 감정의 축축한 습기를 다 쏟아내고 나면, 한결 건조해지고 고요해 지는 정서의 평온을….

그 여자도 눈물을 흘림으로써 그렇게 몸의 독을 비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어쩌면 그 여자도 그 비결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때론 유로주차장에서 어깨를 들먹거리며 울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생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묵주기도를 바칠 때마다 수모와 채찍질을 당하는 예수님을 보며 몸서리친다. 그러나 그 다음엔 부활을 만나므로, 그 아픔을 모두 잊고 환하게 웃을 수 있다. 나는 부활대목에서 늘 말한다. 묵주기도에 나오는 예수님의 일생은 화려하고 웅대하다고. 주님 감사합니다. 살아나셔서 감사합니다. 어찌 부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분노를 용서로 품으시는 우리 주 예수님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