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제의 해 기획-사제의 사제] 6. 토마스 머튼 신부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9-12-02 수정일 2009-12-02 발행일 2009-12-06 제 2675호 7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하느님 ‘안’ 에서 하느님 ‘밖’ 을 일깨우다
토마스 머튼 신부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 우리나라 대부분 사제들의 책상에 한권 쯤 꽂혀 있는 ‘토마스 머튼’신부의 책이다. 그만큼 토마스 머튼은 사제들에게 관상생활의 모범이자 스승으로 다가온다. 토마스 머튼은 또한 세상 한복판에 서 있는 영성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이 시대 사제들에게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기도와 관상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세상의 한복판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많은 사제들로부터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런데 그의 어린 시절과 성장과정을 보면 영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신심과 기도 열정을 보인 다른 사제 모델들과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가톨릭 종교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던 그가 어떻게 이 시대 영성의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시인 교수직 버리고 수도원 입회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월 31일 프랑스의 피레네 산맥 동쪽에 있는 프라드라는 곳에서 태어난 그는 이듬해 미국으로 이주해 어린 시절을 보냈다. 6세가 되던 해 큰 불행이 닥쳐왔다. 어머니의 선종이었다.

“아버지가 편지 한 통을 나에게 주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나에게 보낸 편지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과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쓰고 있었다. 나는 집 뒤뜰에 있는 단풍나무 아래에서 그 편지를 읽고 또 읽고 결국 무슨 뜻인지 알아내고야 말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과 절망이 무겁게 밀려왔다. 그것은 엉엉 소리 내어 울어버릴 수 있는 어린 아이의 슬픔이 아니었다. 몹시 당혹하고 침통한 어른의 슬픔이었다.…”(칠층산, 정진석 추기경 번역).

그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사이를 오가며 성장했고 프랑스에서 거주하기도 했다. 그 무렵 머튼의 나이 16세 때, 부친마저 뇌종양으로 런던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머튼은 고아가 됐다.

이후 머튼은 1933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클래어 칼리지에 입학했다가 19세 때인 1934년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주의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진 그는 독서와 토론을 통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접하게 되고 이를 통해 가톨릭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23세 때인 1938년 전격적인 회두를 하게 되고 박사 학위를 준비하면서 수도성소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40년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영어 강의를 하던 그는 이듬해 12월 10일 켄터키주에 있는 트라피스트의 게쎄마니 대수도원에 입회했다. 문학적 재능과 학위, 시인으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학교수의 직위까지도 모두 던져 버린 그는 켄터키의 황야로 잠적했다. 그곳에서 그는 거친 수도복에 허리띠를 조이며 밭에서 옥수수를 베는 소박한 노동과 기도의 생활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다.

지금까지 누릴 수 없었던 영적 만족감을 발견한 그는 침묵과 고행 속에서 완전한 은둔을 갈망했다. 하지만 그의 재능과 소명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칠층산’ 통해 베스트셀러 작가로

1944년에 첫 서원을 하고 1949년에 사제로 서품된 그는 이미 1948년에 출간된 ‘칠층산’을 통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고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됐지만 자신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상들은 그에게 꾸준하게 글을 쓰도록 했고, 이에 순명해 머튼은 이후 많은 작품들을 저술했다.

그가 저술한 작품들을 보면, 첫 10여년 동안에는 주로 종교적인 주제들, 즉 기도와 금욕주의, 영적 성장 등에 관한 것들이었다. 후기의 저작들은 사회 문제들과 이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과 소명에 대한 광범위한 저작들이다. 인종 문제, 폭력과 전쟁, 경제적 불평등 등 당대의 모든 세계와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고 이를 하느님의 뜻에 바탕을 두고 가르친 그의 저술들은 사람들에게 세상의 평화에 대한 갈망과 열의를 일깨웠다. 기도와 관상의 생활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그는 세상의 한복판에 있는 문제들을 다룬 것이다.

머튼은 수도 사제로서의 삶을 살면서도 결코 세상과 현대와 괴리된 삶을 살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만난 하느님을 현대인들에게 더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는 「칠층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느님은 우리를 알고 계셨다. 하느님은 우리 중의 어떤 이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배반하리라는 것, 그리고 어떤 이는 사랑할 줄 아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절대로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셨다. 하느님은 어떤 이의 개종 때문에 하늘의 천사들이 기뻐하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리고 하느님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그분의 사랑을 찬미하기 위하여 어느 날엔가는 우리 모두를 이곳 게쎄마니로 데리고 오시리라는 것을 아셨다. 이 수도원에 살고 있는 각자의 삶은 신비의 부분이다.”

† 토마스 머튼의 기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는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당장 제 눈 앞에 있는 길도 보지 못합니다. 저는 그 길이 어디서 끝나는지도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그 목마름이 당신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하는 모든 것 안에서 그러한 목마름을 지니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런 목마름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제가 당신께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를지라도, 저는 당신께서 저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처럼 보이고, 제가 죽음의 그늘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저는 언제나 당신을 믿고 의탁하겠습니다.

당신이 늘 저와 함께하시니, 저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홀로 위험에 직면하도록 저를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