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제의 해 기획-사제의 사제] 5. 다미안 신부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9-11-24 수정일 2009-11-24 발행일 2009-11-29 제 2674호 7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나환우와 16년 동고동락… 가슴에 ‘용기’ 심어
그는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지 않아 환자들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다 결국… 그도 한센병을 앓게 됐다.
벨기에(Belgium)? 낯선 나라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유럽 북서부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로 설명되어 있다. 수도는 브뤼셀. 한반도의 약 7분의 1크기 땅에 1050여만명이 살고 있다.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종교는 가톨릭 75%, 기타(개신교 포함) 25%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것이 전부다. 음악에 관심 있는 젊은이라면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주제가를 부른 벨기에 국적의 다나 위너(Dana Winner)라는 여가수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낯선 작은 나라가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위대한 성자를 배출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난 10월 11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벨기에 출신의 다미안 신부를 성인 반열에 올렸다.

1840년 벨기에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하느님 부르심의 징표에 응답하겠다는 비범한 각오를 보여 주었다. 그 결과 성장해서는 형을 따라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The Fathers of the Sacred Hearts of Jesus and Mary)에 입회했다.

그런데 하와이 선교사로 선발된 큰형 팜필 신부가 병자들을 돌보다 장티푸스에 걸리는 일이 일어났다. 형은 더 이상 하와이에서 사목할 수 없었다. 이에 다미안은 형을 대신해 하와이 선교를 자원한다. 1864년 하와이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호놀룰루 근교의 아피마뉴 대신학교에서 약 2개월 간 수학한 후, 그 해 5월 호놀룰루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한 다미안 신부는 섬 곳곳을 누비며 미사를 봉헌하는 등 헌신적으로 사목에 임했다. 그러던 중 그의 삶을 바꾸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하와이 군도에 한센병 환자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이에 감염된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법을 제정됐고, 이에 따라 한센병 환자들은 몰로카이(Molokai) 섬에 격리 수용됐다. 치료와 보호를 위한 격리수용이 아니었다. 한센병 환자들은 철저히 버려졌으며, 외면됐고, 잊혀졌다. 몰로카이 섬의 참상을 전해들은 다미안 신부는 33세의 나이로 그곳에 자원해 700여 명이 넘는 한센병 환자들을 사랑과 자비로 돌보기 시작했다. 집 없는 사람에게는 집을 지어주었고, 손가락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신의 손으로 고름을 짜주고 싸매주었으며, 자포자기한 사람들에게는 재생의 은혜를 가르쳤다. 그는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한센병 환자들에게 다가갔고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지 않아 환자들의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다 결국에는 그 자신도 한센병을 앓게 됐다. 한센병 발병 당시의 모습은 일본인 오타베의 「몰로카이 나병의 섬과 그 영웅 다미안 신부」에 생생히 묘사돼 있다.

“1885년 어느 날 밤 다미안은 언제나 못지않게 피로하여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일도 일이거니와 피로의 도가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목욕을 하면 몸도 기분도 좀 풀리려니 하고 목욕물을 끓였다. 잠깐 실수로 그는 뜨거워진 목욕물을 양말도 신지 않은 발등 위에 쏟았다. 아차 하는 순간 그는 가슴이 덜컥했다. 덴 자리에 아픔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감각의 상실! 그것은 무엇보다 확실한 나병의 증상이다. 다미안은 너무나 심한 놀라움에 그만 옆으로 몸을 눕히고 말았다. 그리고 흉칙하게 일그러진 자기의 마지막 순간이 눈 앞에 떠오른다. 다미안은 일찍부터 이날이 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에 걸린 후에도 계속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쳤으며, 평온과 내적 평화의 놀라운 표양 그리고 충실한 기도, 특별히 자기 수도회의 전통에 따라 성체 조배와 성체 신비 묵상에 대한 놀라운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는 16년 동안 한센병 환자들 가운데서 살며,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교사”라고 말했다.

이런 다미안 신부에 대해 교황요한 바오로 2세는 2005년 이렇게 말했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 치유와 사회 복귀 가능성을 옹호한 세계 최초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의 원천은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고취된 그의 신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신앙의 은총으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를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복음은 특별히 나환자들에게 구세주의 동정심에 대한 생생한 표상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들이 그토록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도덕적인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미안 신부는 이 복음 메시지의 사도요 그 증거자였습니다.”

다미안 신부에게도 죽음이 찾아왔다. 1889년 4월 19일,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한센병 환자들의 옆에 묻혔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진지하게 내적인 기쁨으로 수도 서원을 갱신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지상에서가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한 부활절을 경축하고 싶습니다.”

그의 삶과 신앙은 ‘도화선’(導火線, fuse)이었다.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랑을 온 세계에 전파시키는 도화선이었다. 2005년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방 주민들은 가장 위대한 벨기에인으로 다미안 신부를 선정했다.

▨ 다미안 신부는

선종 즉시 시복 시성 절차가 이뤄질 듯 했지만, 성인품에 오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종한 지 103년이 지나서야 1992년 7월 시복 대상자로 확정됐고, 1995년 6월 4일 벨기에 브뤼셀의 퀘켈베르그 대성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이후 지난해 7월 교황청 시성성은 10년 전 하와이에서 한 은퇴 여교사가 다미안 신부의 전구로 말기 폐암이 치료된 것을 기적으로 인정해 복자 다미안 신부의 시성을 예고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10월 11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다미안 신부가 남긴 말

- 하느님 진실로 내 인생은 행복이었습니다.

- 주님, 저에게도 같은 나병을 허락하시어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게 해주소서

-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다가가게 하기 위해 나도 나환자가 됐습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 나는 교우라는 말 대신, ‘우리 나환자’라고 말합니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