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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해 기획-사제의 사제] 4. 돈 보스코 ② 영성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9-11-18 수정일 2009-11-18 발행일 2009-11-22 제 2673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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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말이 하느님과 함께 한 사제
돈보스코에 있어서 기도는 '교육적 기도'였고 '청원 기도'였으며 무엇보다 '삶의 기도'였다.
돈 보스코가 9살때 꿈속에서 성모님을 만난 후로 성모님은 항상 그의 곁에서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었다.
사제의 해를 맞아 사제 영성에 대해 이야길할 때, 돈 보스코는 특히 가깝게 다가온다. 성인은 은수자가 아니었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 사막으로 가지 않았다. 봉쇄 생활을 하지도 않았고, 기도를 위해 하루 15시간씩 성당에서 무릎 꿇지도 않았다. 성인은 관상가가 아니었다. 또한 그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희생과 절제의 생활을 하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도 아니었다. 그는 교구 신학생으로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끼에리 대신학교 생활을 거쳐 한 교구의 사제요 사목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본당과 교구 중심의 한국교회에서 돈 보스코가 더 가깝게 다가오는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돈 보스코가 기도나 관상을 멀리했다는 말이 아니다. 돈 보스코에 있어서 기도는 ‘교육적 기도’였고 ‘청원기도’였으며 무엇보다 ‘삶의 기도’였다. “한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는 회원에게 그가 한 말은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까?”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런 돈 보스코를 가리켜 “만사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동시에 그의 생각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돈 보스코는 일마저도 기도로 승화시킬 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돈 보스코는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과 대 데레사 성녀를 무척 좋아했다. 데레사 성녀로부터는 하느님의 위엄성에 대한 깊은 헌신을 이어 받았으며, 이냐시오 성인으로부터는 악에 대한 열성적 싸움과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노력을 이어 받았다. 특히 그는 육체적 금욕보다는 정신적 금욕을 강조했다.

실천하는 사랑의 영성

돈 보스코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할 분으로 보기 보다는 사랑해야 할 아버지로 보았다. 그 결과 돈 보스코의 영성은 사목을 통해 세상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침투케 하는 ‘사목적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완전한 삶에 도달하는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론적이거나 학문적인 영성보다는 실천적 영성을 택하였다. 그의 저작들은 추상적 가르침을 담고 있지 않다. 그는 역동적인 영성을 가르쳤다. 그는 특히 젊은이들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인간적 가치들을 존중했고, 자유를 존중했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교육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난한 이들에 대해 지극한 유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도시에 있었다. 운동장과 건물들 안에서 가난한 젊은이들과 만나고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그의 영성은 구체적인 만남을 통해 보다 육화되었으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으로 실현되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많다. 돈 보스코는 그 이웃 중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가난한 젊은이들 안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투신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하였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여러분을 위하여 살고, 여러분을 위하여 나의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 이것은 한 사제로서 그가 걸어간 사도적 활동이었고, 자신을 바쳐 그리스도를 따르는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성모신심

9살의 돈 보스코는 꿈을 꿨다. 넓은 마당에 수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그때 성모님이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가 바로 네 일터이다. 겸손하고 강인하고 굳건한 사람이 되도록 하여라.” 돈 보스코가 울면서 무슨 뜻인지 가르쳐 달라고 애원하자, 성모님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돈 보스코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항상 함께 하시며 그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었다. 성모님에 대한 그의 신심은 어려서부터 그의 어머니께 깊이 영향을 받았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날 그의 어머니는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너를 성모님께 봉헌했다. 이제 나는 네게 온전히 그분의 것이 되라고 당부하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셨다.

돈 보스코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삼종기도를 통하여 하루에 세 번 성모님께 인사를 드리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모든 일의 시작에서 마칠 때까지 즉 닭이 우는 새벽, 일터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성모님께 기도를 드렸다.

결국 이러한 성모신심은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실제로 돈 보스코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살레시오회 모든 활동의 창립자였다. 이는 그의 글 속에는 잘 나타나 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나의 수도회를 시작하기 바라십니다. 우리는 살레시오 회원이라고 불리우게 될 것입니다.”“우리 수도회를 원하시는 분은 바로 성모님이십니다.”“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 사업의 창립자이시요 후원자가 되실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건강이 나빠짐에 따라 돈 보스코는 점점 더 ‘도움이신 마리아’께 의탁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적을 청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기도를 함께 성모님께 드립시다. 정녕코 치유를 해주시고, 들어 주시고, 이해해 주시며, 동정을 베풀어 주시는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응답해 주십니다. 나는 단지 그분께 기도할 따름입니다.”

성인이 돌아가신 후 침대 머리맡의 성모상 아래 홈에서 4000장이 넘는 쪽지가 발견되었다. 모두 다 도움이신 마리아께 드리는 청원기도문이었다.

영혼의 구원

돈 보스코는 ‘포교적’ 사랑을 실천하였고 가르쳤다. 돈 보스꼬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하여” 라는 말에다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라는 말을 종종 덧붙이곤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제가 한 영혼을 구하는 데 성공한다면 저는 제 자신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 확신합니다.”“우리의 영혼을 구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회의 목적입니다.”

▨ 돈 보스코는 1929년 시복, 1934년 4월 시성되었다. 1950년 스페인 정부는 그를 전국 상공업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정하였다. 그는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이며, 편집자와 교정자의 수호성인이다. 또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 돈 보스코가 남긴 말

▲ 여러분이 젊은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여러분을 위하여 살고, 여러분을 위하여 나의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 기쁨 중에 주를 섬기십시오. 달리고 뛰고 소리치고, 죄만 짓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