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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해 기획-사제의 사제] 4. 돈 보스코 ① 생애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9-11-11 수정일 2009-11-11 발행일 2009-11-15 제 2672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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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의 아버지이자 스승
돈 보스코는 거리를 배회하는 많은 청소년들을 위해 기술학교·주일학교·기숙사 등을 세웠고, 아이들을 체벌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했다.
많은 이들이 돈 보스코(Don Bosco·1815~1888) 성인을 두고 ‘사제의 이상형’‘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가톨릭 교육자’라고 말한다. 그는 교회에 청소년 교육 영성을 도입한 대영성가이자, 가톨릭 신앙을 수호한 호교론자였다. 근대 선교 운동의 개척자였으며, 2000여 권의 저서를 남길 정도로 문필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그는 책상 앞에만 앉아있지 않았다. 청소년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그들의 ‘놀이터’에서 일생을 보냈고, 그 한가운데서 일생을 바쳤다.

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시의 베끼에서 아버지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말가리다 오키에니’사이에서 태어났다. 2살이 채 안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에 어려서부터 집안일과 들일을 거들어야 했고, 심지어는 이웃집 머슴살이까지 해야 했다.

많은 이들이 우울한 성장 과정은 불균형적인 인격 형성으로 이어진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학의 전통적 견해는 돈 보스코에게선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는 늘 쾌활했으며 재치가 넘쳤다. 상상력이 풍부했다. 게임과 오락을 즐긴 그는 친구들로부터 가수, 배우, 마술사 등으로 불렸으며 장터에서 본 광대나 곡예사를 즐겨 흉내내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골목대장이었다. 동시에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에 남달리 충실했으며 기도생활에도 열심이었다.

결국 밝고 맑은 성격의 보스코는 1835년 신학교에 입학, 6년 뒤인 1841년에 사제 서품을 받는다. 서품 전날 밤, 보스코는 9가지 결심을 세우게 된다.

▲ 환자 방문과 같은 중대한 이유 외에는 절대로 외출하지 않겠다.

▲ 시간을 엄격히 사용하겠다.

▲ 영혼을 구하는 문제라면 언제나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행하며 자신을 겸손되이 낮추겠다.

▲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자애와 온유를 본받겠다.

▲ 건강에 해롭지 않는 한 어떤 음식이 차려져 있든 항상 만족하겠다.

▲ 포도주를 마실 땐 물을 타서 마실 것이며 건강에 도움을 주는 정도로만 마시겠다.

▲ 일은 영혼을 해치는 적들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다. 그러므로 하루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 이상은 자지 않겠다.

▲ 묵상과 영적 독서를 위해 매일 얼마간의 시간을 할애하겠다. 미사 전에는 최소한 15분 전에 미리 준비할 것이며, 미사가 끝난 뒤에도 15분 이상 감사경을 올리겠다.

▲ 고해성사를 주거나 혹은 영적 지도에 필요한 때 외에는 여성들과 절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사제 보스코는 모든 노력을 다해 자신의 결심을 실천해 갔다. 이후 그는 우연히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젊은이들을 방문하는 경험을 한다. 또 얼마 뒤에는 성당의 제의방에서 한 고아 소년을 만난다. 이로써 그는 청소년과 젊은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길로 들어선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소년들이 집도 일거리도 없이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돈 보스코는 뒷골목을 방황하는 소년들, 전쟁고아들, 교도소에서 만난 수많은 청소년들, 공장 소년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구두 제작, 양재, 목공, 인쇄 제본 등의 기술을 소년들에게 가르쳤다.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고아들과 가출 소년들을 위해 기숙사를 세웠으며, 제본소나 인쇄소 등의 직업학교와 기술학교도 시작하였다. 저술과 출판활동으로 자신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도 땀을 흘렸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공부하고, 나의 생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소년들은 모두가 제각기 자신이 돈 보스코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으며, 자신들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돈 보스코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강요와 체벌을 가하지 않았다. 아이들과 그 사이에는 종교적 유대감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엄격한 규율이나 훈련을 피하고 사랑으로 대하였으며, 각자의 성장과 발전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관찰, 대응했다.

그는 이어 그의 청소년들 중에서 미래의 협력자들을 찾아냈다. 이들을 중심으로 1859년 살레시오회를 창설, 선교사업을 전개했으며 이 수도회는 1869년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았고, 1871년 회헌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소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립하였고, 1876년에는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설립했다.

땀과 기도로 일관한 일생이었다. 1888년 1월 31일 새벽 72세의 돈 보스꼬는 미소를 머금은 채, 하느님 품에 안긴다. 그는 최후의 순간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 돈 보스코는 1929년 시복, 1934년 4월 시성되었다. 1950년 스페인 정부는 그를 전국 상공업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정하였다. 그는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이며, 편집자와 교정자의 수호성인이다. 또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 돈 보스코가 남긴 말

▲ 신부는 혼자서 천국이나 지옥에 가지 않는다. 잘 살면 그의 좋은 표양으로 구원된 영혼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잘 살지 못하거나 악표양을 주게 되면 그 악표양으로 저주받은 영혼들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이다.

▲ (돈 보스코의 건강을 염려하며 휴양을 권하는 한 부인에게) 저는 제 건강을 돌보기 위해 신부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