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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위 시복시성 기원 특별기획 - 이슬은 빛이 되어] (14) 순교지별로 살펴보는 124위 - 대구대교구①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09-11-11 수정일 2009-11-11 발행일 2009-11-15 제 2672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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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주님 손에 맡깁니다”
대구 관덕정서 ‘하느님의 종’ 19명 순교
대부분 축일 지내다 체포 … 참수형 당해
현재의 관덕정 순교기념관. 조선 후기 관덕정은 군관과 별무사를 선발하는 시험장과 연병장의 한 부분으로 성 이윤일 요한 등 많은 교우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대구대교구에서는 19명의 하느님의 종이 관덕정에서 숨졌다. 옛 대구읍성의 남문 밖에는 관덕당(觀德堂)이 있었는데 이곳은 군관과 별무사를 선발하는 시험장이었고 앞은 넓은 연병장이었다.

군문효수형을 받은 중죄인의 처형장은 연병장의 한 부분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던 탓에 성 이윤일 요한을 비롯한 많은 교우들이 1816년부터 1867년까지 이곳에서 숨졌다.

형제 고성대·고성운

관덕정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가운데는 성 김대건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로 잘 알려진 ▲김종한(안드레아)뿐 아니라 ▲고성대(베드로) ▲고성운(요셉) 형제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충청도 덕산에서 태어난 그들은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마음을 모아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등 열심한 신자가 됐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포졸들에게 체포돼 신앙을 증거했지만, 목숨을 보전하려는 유혹에 넘어가 석방됐던 기록이 있다.

형제는 경상도 청송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으로 이주해 살다 1815년 부활대축일 밀고자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돼 경주로 압송된다.

지난번 유혹에 넘어갔던 형제는 그동안 후회하며 ‘이 큰 죄를 보속하려면 칼을 맞아야 마땅하다’고 되뇌던 터라 이번에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켜냈다.

감사가 주재하던 대구로 이송된 그들은 이어지는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생활을 하다 1816년 12월 19일 나란히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형제는 모두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동정을 지키고 있었다.

부부 서석봉·구성열

관덕정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가운데는 형제뿐 아니라 ▲서석봉(안드레아) ▲구성열(바르바라) 부부도 있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입교한 구성열은 첫 남편을 잃고 서석봉에게 개가했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서과부’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이 부부 역시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으로 이주해 교우들과 생활하다가 1815년 부활대축일에 체포, 경주로 압송된다.

부부는 이곳에서 배교를 거부하는 동료들과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돼 여러 차례 계속되는 형벌을 참아내며 1815년 11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남편 서석봉은 형벌로 인해 쇠약해져 옥에서 순교하고 말았으며, 구성열은 이 모든 아픔을 이겨내고 1816년 12월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다.

부부에게는 당시 ▲최봉한(프란치스코)이라는 사위도 있었는데 그 또한 하느님의 종에 속해 있다. 최봉한은 장인 부부와 함께 체포돼 경주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장모 구성열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보고 끊임없이 권면하기도 했다.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된 최봉한은 30세를 갓 넘긴 나이에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장인과 함께 옥중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부자 박경화·박사의

▲박경화(바오로)와 ▲박사의(안드레아)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다.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은 아버지 박경화는 1827년 이전까지 충청도 지역에서 비신자들을 입교시키고 교리를 가르치는 등 덕행을 닦다가 정해박해 때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해 4월, 주님승천대축일을 지내다 체포된 박경화는 형벌을 받는 동안에도 ‘내 육신은 관장에게 맡기지만, 영혼은 주님의 손에 맡긴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는 노령에다 혹독한 형벌로 인해 1827년 11월 70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교했다.

아버지와 같은 때 체포된 아들 박사의는 함께 형벌을 받고도 옥에서 아버지를 보살피는 등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조정에서 판결을 내리지 않아 아버지가 순교한 후에도 12년 동안 고통 속에서 살았던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사형을 당했다.

사형소식을 전해듣자 그는 기뻐하며 다른 죄수들에게 자신이 쓰던 물건과 옷을 나눠주고 참수형으로 순교했는데 당시 죄수와 옥졸들은 모두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관덕정 순교기념관 벽에 부조돼 있는 순교자들의 행렬 모습. 순교자들의 목을 안고 있는 천사의 상과 순교자들의 마지막 모습이 거룩하게 느껴진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