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제의 해 기획-사제의 사제] 3. 복자 루이지 마리아 몬티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9-11-03 수정일 2009-11-03 발행일 2009-11-08 제 2671호 9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완전한 평등 실천한 주님의 충실한 종
이탈리아 작은 마을 성가정서 탄생… 1852년 수도회 입회
젊은이들 모아 함께 복음 나누고 병든 이들 돕는 등 선행
‘사랑의 사도’ 루이지 마리아 몬티(Luigi Maria Monti).
1825년. 영국에서 철도가 처음으로 개통되던 그 해, 베토벤이 각혈을 하고 코피를 쏟아가며 캐논을 작곡하던 그 해, 성 정하상·성 유진길 등이 한국교회의 수난을 교황청에 보고하던 그 해, ‘사랑의 사도’ 루이지 마리아 몬티(Luigi Maria Monti)가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늘 성가정을 강조했다. 몬티 가정은 늘 기도와 일상의 노동으로 하느님을 경배했다. 아버지는 늘 “가정은 교회”라고 강조했다. 가정 내에서의 다툼과 기만은 성당에서 싸우고 속이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하곤 했다. 이 아버지는 몬티가 12살 되던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몬티는 어쩔 수 없이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는 목공소에 취직했다. 이곳에서 그는 동년배들과 함께 일하고 기도하며, 영적 대화를 나눴다. 몬티는 이후 수도생활에 대한 강한 열망을 보였고, 직장 동료 및 마을 동료들은 몬티의 깊은 신심에 이끌리며 몬티와 함께 수도자와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갔다. ‘재속 봉헌’(consecratio mundi)의 선구적 모범을 보인 것이다.

젊은이들은 몬티와 함께 틈만나면 함께 모여 해가 질 때까지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복음말씀을 나눴다. 성지순례를 함께했고,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이들의 모습은 주변인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더 많은 젊은이들이 몬티 주위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직장을 수도원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그대로 하느님께 봉헌했다. 몬티는 이후 1852년 동료 5명과 함께, 당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던 ‘성모 마리아의 아들회’의 일원이 되었고, 훗날 이 수도회의 ‘진정한 아버지’이자 ‘설립자’가 된다.

그에게는 수많은 좌절이 있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라. 네가 나를 위해 젊은 청년들을 모아 그들이 순수함을 지키고 정결 속에서 살 수 있도록 그토록 많은 일을 했는데, 그런 너를 내가 저버릴 수 있겠느냐? 용기를 내어라”라는 성모 마리아의 계시를 믿고 따랐다.

몬티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외과 응급처리와 약조제와 간호사 업무를 공부했는데, 특히 간호사 일에 주력했다. 이후 몬티는 평생을 어려운 이웃과 환자를 위해 바치게 된다. 많은 이들이 앞장서서 일할 때 그들의 뒤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했다.

그는 특히 사랑은 신체에 있어서 피가 차지하는 역할과 같은 것이라 말하곤 했다. 더 나아가 그는 겸허했다. 항상 자신이 주님의 은혜를 모르는, 마치 죄로 가득찬 사람처럼 회개를 열망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는 수도회의 이익과 관계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자신을 방어하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소박함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교회와 식당에서 우리는 동일하다. 비록 우리의 역할은 다르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이 배고픈 자들인 것이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완전한 평등을 원했다. 그는 심하게 아플 때조차도 특별한 치료와 대우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도 먹지 않는 음식을 골라 먹었고, 허리 디스크, 위궤양, 눈병 등으로 고통받았으나 참을 수 있는 한 표현하지 않았다.

신체적 고통은 하느님을 위해 바쳐야 하는 하나의 의무로 간주했고, 또한 이러한 고통들이 일상생활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는 고통의 가치를 인정했다.

몬티의 영혼은 성경을 읽고 기도와 성사 속에서 겸허하게 그러나 힘차게 신적인 것을 갈망했다. 가능한 한 자그만 죄도 짓지 않고, 내쉬는 숨 하나하나와 행하는 행위 하나하나를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바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갈망했다.

“나는 진정 그분께(주님께) 자그마한 슬픔도 끼치지 않고 어떤 잘못도 고의로 저지르지 않고 근면하게 이를 행했던 것일까. 아니면 나는 이런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오! 좋으신 하느님!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는 이 세상 삶은 그분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 굳게 믿었다. 이 세상을 주님의 집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그는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었지만, 영혼의 눈길은 항상 천상을 향해 있었다. 그에게는 창조물의 아름다움도, 인류의 비참도, 기쁨과 고통도,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한 부분이었다. 그리하여 신앙의 기쁨이 영혼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몬티는 땅에 발을 단단히 딛고 선 사람이었다. 어려운 문제 앞에서 그는 어려움의 깊이를 이해했고, 강인하나 신중하게 대처했다. 그는 이상은 높았지만, 구름위에 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감정에 따라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주님과 자신과의 끊임없는 일치를 유지시키는 신앙의 빛에 따라 걸어갔다. 성모 마리아께서 길을 인도하시도록 자신을 맡겼으며 성모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행했다.

아름다운 그의 삶도 서서히 마지막으로 향하고 있었다. 1990년 9월 26일 그는 병자성사를 받았다. 옆에 있던 수도회 형제가 울었다. “자네 왜 울고 있나? 우는 건 쓸데없는 일이라네.”

고통을 견디는 그로부터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는 오직 주님과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화살기도뿐이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십자가에 입을 맞추곤 했다. 그리고…. 9월 30일 저녁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몬티는 동료들에게 강복을 주고, 이튿날 오후 6시경,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로마가 슬픔에 휩싸였다. 로마의 한 신문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평화 속에, 이 충실한 종의 영혼을 거둬들이셨다.”

▨ 그리스도의 사랑을 일생동안 온몸으로 살다 간 루이지 마리아 몬티는 선종 100년 후인 지난 2003년 11월 9일, 복자품에 올랐다.

몬티 신부가 묵상 중에 던진 질문들

▲얼마나 겸허한가

▲어떻게 사랑을 행하고 있는가

▲정절은 어떠한가

▲순명은 어떠한가

▲청빈은 어떠한가

▲주님의 뜻에 얼마나 부합하고 있는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

▲자신의 의식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는가

▲숨결하나하나와 행위 하나 하나를 주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바치고 있는가

▲매일 얼마나 많은 화살기도를 올리고 있는가

몬티 신부 곁에는 늘 젊은이들이 모여 들었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