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달자의 주일 오후] 인생이 무엇이냐고 네가 물었다

입력일 2009-10-28 수정일 2009-10-28 발행일 2009-11-01 제 2670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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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약간의 비가 내렸다. 중요한 일이 있는 너는 예감이 별로 좋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이에게 중요하지 않은 하루가 어디 있겠니. 네 옆에 있는 사람은 ‘아침의 비는 어제의 먼지를 깨끗하게 씻어 주는 청량제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 사람의 생각이 그 사람의 인생을 만든다’는 말로 인생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므로.

조금 싱거운 대답부터 하자면 인생은 답이 없는 것이다. 답이 없기 때문에 해석하는 사람 저마다의 삶이 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침 식사를 하고 이를 닦는 것도, 전화를 거는 것도, 거리를 걸으며 휴지 하나를 줍는 것도, 신문을 읽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일도 모두 답이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학교에 다닌다. 그 채점은 인생이 끝날 때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인생은 결코 낙제점수를 보완할 수 있는 재등록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따라 엄격하게 점수가 매겨진다.

자, 그러면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다. 어느 화가가 단 한 장의 종이를 지니고 사막에 섰다. 그리고 싶은 욕망은 수없이 타오르는데, 종이는 단 한 장뿐이다. 과연 화가는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리고픈 욕망을 자제하고 자신을 낮춰 진정으로 그리고 싶은 가장 소중한 것을 그리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데 많은 시간을 바칠 것이다. 결국엔 자신이 원하던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패는 아니다. 설령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단 한 번 허락된 인생을 천 가지로 표현하려 하지 마라. 천 가지의 욕망을 에너지로 모아 한 가지에 매진하는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 인생은 요약할 수 없는 것이다. 오르고 쓰러지고 넘어져 상처투성이가 돼서야 정상에서 황홀감을 맛볼 수 있다. 짐을 대신 져 주는 사람도 없다. 모두 자신이 철저하게 감당해야 한다. 슬픔과 좌절과 공포, 그리고 희열과 기쁨을 모두 겪어야 인생의 정점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정신병자 같아지거나 기억상실증에 걸릴 수도 있다. 느닷없이 따귀를 얻어맞을 때도 있다. 너를 속이려는 누군가가 숨어있을 수도 있다. 배신감도 느끼게 될 것이다. 원하지 않는 것들이 태산처럼 등을 무겁게 내리 누를 것이다. 피할 수 있겠느냐. ‘누구야!’하고 부르면 누군가 대답할 것 같으냐. 아무도 없다. 어쩌면 그 실체의 그림자는 너 자신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까지도 받아들여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 인생이란 친교의 광장과 같다. 다 사귀고 끌어안고 살을 비비면 그 폭력으로부터 솟아오를 수 있다. 피를 나누거나 살을 섞는 사람과는 더욱 진지한 관계가 된다. 진지하기에 서로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더욱 사랑해야 한다.

주기만하고 받지는 않는 예수님 같은 인내심을 가져야만 사랑은 지속될 수 있다. 마치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까지 내어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러나 인생에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항목들이 많단다. 이를 꿋꿋하게 견뎌내야 말이 되는 인생이 펼쳐진다.

나는 젊은 시절 생의 혐오와 황홀이 공존하는 것인지 몰랐다. 오히려 왜 두 개가 필요하냐고 따졌다. 그런데 누가 말했다. 인생에는 몇 번의 죽음과 몇 번의 부활이 필요하다고. 아니 반드시 누구에게나 이렇게 찾아온다고. 인생은 학교다. 어떻게 사느냐를 배우는 곳이다. 이를 위해 전 생애를 필요로 한다. 만일 우리가 지상의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않는다면 결코 천상의 학교로 진학할 수 없을 것이다.